이 책 『감정의 자국들』은 사랑, 상실, 그리움, 위로라는 이름을 빌린 감정의 미로 속을 섬세하게 걸어가는 시집이다. 마치 마음의 기온을 측정하듯, 말로 다 표현되지 못한 감정의 결들을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 주고, 조심스럽게 어루만져 주는 이 책은 단지 읽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책’이다.
한하리 작가는 “다정해지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이 아파야 했을까?”라는 문장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이 질문은 흔한 수사적 표현이 아니다. 책 전반에 흐르는 정조이며, 작가 자신이 감정의 굴곡을 통과하며 얻어낸 성찰이다. “당신도 그런 적 있나요? 마음 한 귀퉁이에 오래 눌러 담은 감정을, 제때 꺼내지 못해 더 깊어져 버린 순간들이요”라는 문장에서 보듯, 이 책은 잊힌 감정, 말하지 못한 마음에 대한 애틋한 복기이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시 중간중간에 짧막한 ‘감정사전’ 글이 들어가 있다. 특히 ‘이상형의 기준’, ‘질투’, ‘불이익’, ‘어쩔 수 없었어’ 같은 글들은 짧지만 묵직하다. “너무 당겨쓰다가는 막상 중요한 순간에 더 이상 태울 심지가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모르니 주의할 것”이라며 ‘열정’을 경고하는 문장은 감정의 소비를 돌아보게 한다. 감정의 언어에 무게를 더하고, 독자가 자신의 마음을 되짚을 여백을 남긴다.
1~3부에서는 사랑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로 인한 불안과 두려움, 상처와 회복을 따라간다. ‘몰입’, ‘포기로 당신을 사랑하는 일’, ‘울지 못하는 멍청이의 굴레’, ‘관계의 종말’, ‘우리는 늙고 사랑은 낡아도’ 등 한 편 한 편이 감정의 파편이자 작은 서사다. 감정이 감정으로 설명되지 않고, 구체적인 상황과 이미지로 풀어진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슬픔이란 건 왜 이렇게 미련할까? 물에 번진 잉크처럼 서서히 쌓이고 쌓여서 돌이킬 수 없을 때에야 댐 터지듯 터져…”라는 문장처럼, 이 책은 단어 하나에도 절절한 마음이 실려 있다. 이 감정들은 너무 뜨거워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하고, 너무 미세해서 손에 쥐기 어려운 것들이기에 오히려 글로 남겨져야 했을 것이다.
『감정의 자국들』은 관계의 끝자락에서, 마음이 다쳐 울지도 못할 때 꺼내 읽을 수 있는 작은 담요 같은 책이다. 누군가에게는 지나간 연애의 복기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감정의 지도일 수 있다. 그러나 누구에게든 이 책은 “괜찮아, 그 마음 나도 알아”라고 말해주는 다정한 친구가 되어준다.
작가가 경험한 감정은 고유한 것이지만, 그 결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우리 자신의 자국을 발견하게 된다. 작가의 언어는 누군가에게는 오래된 기억의 상처를 조용히 쓰다듬는 손길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지금의 마음을 비춰보는 작은 거울이 된다. 감정의 이름을 배우고, 그 이름을 스스로에게 붙여 주는 것! 그것이 곧 다정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이 책은 천천히, 그러나 다정하게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