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야 이 세상이 존재한다. 내가 있음으로써 해가 뜨고 달이 진다. 내가 땅에 발을 딛고 있으니 비로소 네가, 내가 감각된다. 우리는 ‘우리’라는 표현이 일상에서 자주 차용될 때 ‘우리’라는 공동체 또는 ‘나’의 존재를 비로소 각인하는 것이다. 사전적 의미에서 ‘우리’는 ‘자기와 함께, 자기와 관련되는 여러 사람을 다 같이 가리킬 때, 또는 자기나 자기편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윤영기 시인은 공감각적 심상을 통해 그 안에 내재한 자신과의 조우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이전과 이후의, 아니면 이후의 ‘나’를 만나기 위해 ‘이전’의 나를 끊임없이 밀어내고 또 밀어낸다.
밤새 산고를 치른 빌딩들은 지쳐 있다
흥건한 분비물 속에 누워있는
휴지와 소주, 음식물들로 잘 버무려진
속이 꽉 찬 종량제봉투들
아침이면 차곡차곡 청소차에 실린다
어젯밤, 영하의 날씨에도 꽁꽁 언 몸으로
강남 빌딩들은 불을 밝혔다
소망 기업 최 대리는 밤새 컴퓨터와 씨름했고
원조 숯불갈비 집 암소 갈비는 석쇠 위에서
풍만한 몸을 지글지글 태웠다
에덴 생맥주는 1000cc 머그잔에서
부글부글 끓어 넘쳤다
여자들은 구구대며 해산물 찌개를 포식했고
취한 남자들은 노래방에서 수탉처럼 울부짖었다
소각장에서 한 줌 재로 사라지며
검은 연기를 피워 올릴 무정란을
낳기 위해서
알들을,
알들을 낳기 위해서
-「산란」 전문
왕고목은 몸을 털지 않는다
몸이 흔들려도 몸을 털지 않는다
온몸 부서질 듯 비바람에 흔들려도
쏟아지는 함박눈 어깨 휘어져 가지들
뚝뚝 부러져도 왕고목은 몸을 털지 않는다
딱따구리 여윈 가슴에 구멍을 뚫어도
줄 다람쥐 왕밤 물고 등줄기를 오르내려도
산 까치 머리에 둥지를 틀어도 몸을 털지 않는다
불볕더위 매미들 고막 찢어지게 울어
머리가 아파도 왕고목은 몸을 털지 않는다
어스름 저녁 거미들 어지럽게 집을 지어도
벌레들 아귀아귀 속살 다 파먹어도 몸을 털지 않는다
늦가을 찬바람에 잎새들 다 떠나가도
고목들 다 쓰러져 혼자 남아도
왕고목은 몸을 털지 않는다
왕 고목은 결코 몸을 털지 않는다
왕 고목은 몸이 흔들려도 몸을 털지 못한다
몸을 터는 것은 왕고목이 아니다
-「왕고목은 몸을 털지 않는다」 전문
위의 시 「산란」과 「왕고목은 몸을 털지 않는다」가 보여주는 메시지는 단호하다. 그 어떤 고난과 역경에 맞닥뜨려도 결코 흔들릴 수 없다는 단호한 외침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칼은 제집에서만 운다
칼집에 머리를 묻고 울다 잠이 든다
칼집은 칼이 한껏 울게 공명하며 속으로 운다
그래서 칼은 울음 속 울음을 또 운다
고요하고 어두운 칼집에서 잠들었다가
벼린 얼굴에 날을 세우고 집을 나서는
칼의 눈은 맑고 깊다
칼은 칼의 집에서 쉬어야한다
집 없는 칼을 생각해보라
명검名劍이라도 비에 녹슬고
볼품없이 아무데나 뒹굴어 발길에 차일 것이다
뻣뻣이 고개 쳐든 잡풀 아래
머리를 박고 묻혀버릴 것이다
칼이 칼 같을 때
스스로를 겨눌 때
무대에서 춤출 때
집을 생각 한다
칼은 돌아가기 위해서
칼집에서 울다 잠들고 싶어서
집에서 나오는 것이다
-「칼」 전문
그냥 두면 한낱 쇠붙이에 불과했을 것을 불에 달구고 수만 번 망치질하고 물에 식히고 다시 불에 달구고 모양을 다듬어 장인이 명검을 탄생시켰고, 그 명검이 쉴 수 있는 집도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시인은 여기서 칼을 의인화하여 ‘칼은 제집에서만 운다/ 칼집에 머리를 묻고 울다 잠이 든다/ 칼집은 칼이 한껏 울게 공명하며 속으로 운다/ 그래서 칼은 울음 속 울음을 또 운다’라고 한다.
칼집 안에서의 울음은 무엇인가, 외출 잘하고 밖에서 제 할 일 다 하고 와서 왜 우는가, 그런데 실컷 울고 난 뒤의 칼이 ‘고요하고 어두운 칼집에서 잠들었다가/ 벼린 얼굴에 날을 세우고 집을 나서는/ 칼의 눈은 맑고 깊다’고 했다. 새로운 결의를 보이는 것 같다. 강을 거슬러 올라 가는듯한 경쟁 사회에서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 하지 않으면 ‘명검(名劍)이라도 비에 녹슬고/ 볼품없이 아무데나 뒹굴어 발길에 차일 것이다/ 뻣뻣이 고개 쳐든 잡풀 아래 머리를 박고 묻혀버릴 것이’라서 때로는 에너지 재충전을 위해서 충분한 휴식 즉, ‘칼은 칼의 집에서 쉬어야한다’는 것이다. 머무를 곳이 없는 ‘집 없는 칼’은 참회도 자아 성찰도 아주 힘이 들 것이라 추정한다.
버거운 하루를 보내면서 칼의 일상 같은 현대인들은 생활 터전인 ‘무대에서 춤출 때/ 집을 생각 한다’는 것. ‘칼은 돌아가기 위해서/ 칼집에서 울다 잠들고 싶어서/ 집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역설적으로 집을 나서는 이유를 꼬집는다.
이해타산에 연관된 타인들이 없는 곳에 돌아가서 달콤한 휴식을 취하고 싶은 사람(칼)의 소망, 어쩌면 집도 없는 유랑인에게도 그 꿈은 있을 것이다.
한 권의 시집에서 일관되게 만나게 되는 것은 ‘달리다’, ‘흔들리다’라는 동사인데 그것은 시인의 가 닿아야 할 궁극의 유토피아를 꿈꾸기 때문이다. 지극히 소박한 꿈이면서 매우 마땅한 자기만의 세계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기회를 만들 것, 매우 애쓸 것, 그래야 순간순간 ‘자기화’의 과정을 통해 ‘아름다움’, ‘기쁨’, ‘깨달음’으로 현현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