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소에서 벌어진 의문의 화재 사건으로
첫 책이 불타버린 신인 소설가가 유명세를 얻게 되고,
그의 책이 불길을 데려왔다는 소문이 퍼지는데!
김혜빈 작가는 『그라이아이』로 박화성소설상을 수상할 당시 구병모, 이기호 작가로부터 “지체 없이 본론으로 들어가며 1부에서 시선을 빼앗기게” 만드는 신인, 우찬제 문학평론가로부터는 “샤먼의 복화술사 같은 환상적 이야기꾼의 등장”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번 신작 『등에 불을 지고』는 앞선 장점들이 극대화된 작품으로 장편을 책임감 있게 끌고 가는 작가, 김혜빈의 등장을 다시금 알리는 신호탄이 된다.
소설은 돌연 인쇄소에서 벌어진 화재 사건으로 시작한다. 한평생 아버지가 일궈온 자리에는 뼈대만 남은 인쇄소 건물과 사상자 그리고 그날 인쇄되었던 타다 만 신인 소설가의 첫 책만이 남아 있다. 경찰이 화재의 원인을 찾는 사이, 화재 사건을 다룬 기사들 사이로 사람들의 추측이 점화된다. 화재 현장에 주목하던 기자들은 점점 인쇄소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관계나 첫 책 출간이 미뤄진 신인 소설가의 사생활에 대해 보도하기 시작한다. 어느새 사람들은 화재와는 크게 관련이 없는, 자극적인 소재에 저마다의 추측과 일말의 가능성을 더해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
그 과정에서 ‘그 소설이 불길을 데려왔다’는 소문이 퍼지고, 사람들은 ‘도대체 그 소설이 무엇이기에?’ 궁금해하는 지경에 이른다. 각종 커뮤니티에서는 소설가 유기영의 작품을 한 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을 찾거나, 읽어봤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감상과 견해가 오르내린다. 그 과정에서 유기영은 자신의 책에 대해, 화재 사건에 대해 적당한 흥밋거리와 궁금증이라는 불쏘시개를 조용히, 그리고 끊임없이 제공한다.
혼란 속 실체를 올곧게 바라보려는 시도
그 속에서 작가가 길어 올린 우리 사회의 민낯
무엇이 우리의 눈을 가로막고 있는가?
화재 사건의 초점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동안, 호연은 깨어나는 것이 과연 당사자에게 좋은 일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다친 아버지의 침상을 지킨다. 아버지와 인쇄소에 대한 근거 없는 말들이 재생산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호연은 막연한 두려움과 함께 ‘정말 저 말들이 사실은 아닐지’ 의심하고픈 유혹에 휩싸인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새롭게 알게 된 아버지의 사생활은 호연의 마음에 일어나는 강렬한 거부감만큼이나 짙은 의심의 씨앗을 심는다. 하지만 사실을 이야기해줄 아버지는 말이 없고, 호연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불확실한 상상의 한가운데 서 있게 된다.
그런데 만약 아버지가 깨어나 진실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호연은 그것을 믿을 수 있을까? 저마다의 추측을 더해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과 아버지에 대한 호연의 믿음은 무엇이 다를까? 피부의 대부분이 손상된 채로 막 구급차에 실린 아버지를 보았을 때, 호연은 물었다. “이 사람이 정말 저희 아버지가 맞나요?” 눈앞의 사람에게는 호연이 익숙하게 기억하는 아버지의 얼굴과 목소리, 체취, 감촉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구급대원은 동생에게 아버지의 바지와 신발을 확인했다고 했다. 그제야 호연은 낡은 신발에 난 낯익은 찢긴 자국을 발견한다. 그 작은 자국 하나로, 아버지가 아니었던 사람이 일순간 아버지가 된다.
호연을 둘러싼 소설 속 환경은 현실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는 매일 원하든 원치 않든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와 에스엔에스, 기사 들 속에 노출되어 있다. 그 정보들은 우리를 사건의 본질로 안내하기도, 끝없이 먼 곳으로 데려다놓기도 한다. 사실과 추측이 묘하게 뒤섞인 정보들은 언제나 우리 곁에 도사리고 있다. 소설의 인물들은 현실과 매우 유사한 환경 속에 놓여 독자에게 몇 가지 예시로써 다가간다. 현혹을 생산하려 드는 인물 안에서도 적극적인 유형과 고민의 경계에 걸친 유형이 있고, 본질에 다가가려는 인물 안에서도 끝내 현혹되지 않는 유형과 이미 현혹되어 그것이 본질이라 믿는 유형이 나온다. 소설에서 이러한 유형을 구분하는 과정은, 책장을 덮은 뒤 마주한 현실에서 현혹과 본질을 가려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줄 것이다. 가장 먼저,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 자신은 현혹되지 않았다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말하고 싶은 것을 믿는다.
이건 그냥 책이 아닌가?
지금 우리 발밑이 불타고 있잖아.”
독자들은 멈출 새 없이 흘러가는 눈앞의 사건들을 따라가는 동안 자연히 익숙한 사실 하나를 잊게 된다. 바로 이 소설의 배경이 비무장지대 안에 위치한 ‘녹우리’라는 마을인 점이다. 억 단위의 손실을 입힌 화재 사건에 둘러싼 진실과 사라진 동창생의 행적을 따라가는 일과 자꾸만 불씨를 일으킨다고 제보가 들어오는 유기영의 책에 대한 소문 들을 쫒아가며 우리는 자연히 궁금해진다. 과연 소설이 어떻게 끝을 맺을까? 이 사건들의 진실은 무엇일까?
‘그런데 이건 그냥 책이 아닌가?’ 많은 비밀을 지닌 듯 보이는 사건과 ‘녹우리’라는 마을이 현실에도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 가운데 우리가 무엇에 더 흥미를 가지는지 알아차리는 순간, 이 소설은 새롭게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야기를 따라가던 사람들은 불을 보는 순간 알아차린다. 곧 이야기가 끝나겠군. 그런데 뭘 태우는 거지? (…) 그러나 불은 단순하다. 태울 무언가가 없다면 꺼진다. 불을 키우는 건 불이 아니다. 불은 숨결, 볏짚, 증오, 사랑을 디디고 일어난다.”(76쪽)
발화점을 일으키는 온갖 이야기들을 의심하게 만드는 이 소설의 작동원리 역시 소설이라는 장르 안에서 발생한다. 작가는 소설 속 소설 『부름』을 통해 해체하고자 한 ‘이야기의 속성’을 ‘소설’과 ‘책’으로 비롯되는 이야기 자신을 앞세워 전한다. “이야기가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건 환상이야. 강간하고, 때리고, 총질하는 세상은 바뀌지 않아. (…) 더 이상의 기록은 무의미해. 우리 발밑이 불타고 있잖아.”(126쪽) 그럼에도 소설을 통해 독자에게 가닿으려 한 작가의 이 기록은 아이러니하게도 누구보다 소설이, 이야기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재현, 그것은 오히려 불가능하기를 바라는 힘이다.”(188쪽) 그 때문에 이 소설은 끝으로 갈수록 더 간절하게 자신의 작동원리가 재현되지 않기를 역설한다.
연기에 현혹되지 말고 이미 당도해 있는 불타는 발밑을 바로 보자고, 이 소설은 스스로를 제물 삼아 우리 곁에 당도했다.
“이번에는 정말, 정말로 큰일이 일어날지도 몰라. 이 같은 막연한 두려움 속에서 소설과 예술이 작아지고, 내가 작아지는 시간을 견디다가 시간이 흐른 지금에는 어쩌면 그날의 감정들이 이 소설을 견인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도발과 포격과 선전과 대응 사이에 인간이 자고, 먹고, 밭을 갈고, 내일을 갈구하거나 망치고 있지만 그사이에도 소설은 생의 자각을 향해 나아갑니다.” _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