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주의 말은 그냥 말이 아니다.…… 정말 눈물겨운 생각들이
구슬처럼 꿰어져 있다.”―권정생(아동문학가)
에고가 묻고 참나가 대답한다
맨 처음 대화의 상대로 등장하는 사물은 ‘돌’이다. 밤늦게 길을 걷던 저자가 돌을 밟으며 오지게 넘어지는 통에 허벅지가 벗겨지고 멍이 들고 부어올랐다. 다음날 아침, 그 돌을 찾아가 마주앉아서 말을 건다. “너 때문에 내가 넘어졌다.…… 무슨 할 말이 있거든 해봐라.” 한참동안 잠자코 있던 돌이 입을 연다. “간밤에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네. 가만히 있는 나를 자네가 와서 밟았고, 그래서 내 몸이 퉁겼고, 그래서 자네가 넘어졌을 뿐.”
이들 사이에 수차례 더 대화가 오가고 돌은 마침내 이렇게 말한다. “앞으로는 무슨 일을 겪게 되든지 ‘너 때문에’라든가 ‘누구 때문에’라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도록 마음을 챙기시게.”(이 책, 14∼17쪽)
또 어느 날엔가는 잔칫상 한 모퉁이에 무심코 던져진 소주병 뚜껑을 손에 들고는 “버림받은 느낌이 어떠냐?”며 말을 건다. 그러자 병뚜껑은 “나는 버림받지 않았네. 아무도 내 허락 없이는 나를 버릴 수 없으니까”라고 답한다. 그러곤 더 이어지는 대화. “병 입을 꼭 막고 있다가 비틀려 열리면서 더 이상 ‘뚜껑’으로서의 할 일을 못하게 되었는데 아무 소감이 없단 말이냐?”(저자) “뚜껑이란 열리려고 있는 물건일세. 내 이제 바야흐로 소임을 완수했거늘 어찌하여 ‘할 일을 못하게 되었다’고 하는가? 굳이 소감을 묻는다면, 더 바랄 무엇이 없네. 자족自足이야.”(병뚜껑)
이렇게 병뚜껑은 ‘뚜껑은 열리려고 있는 것’이라는 새로운 관점과 동시에 ‘쓸모없어진 존재’를 ‘소임을 다한 존재’로 볼 수 있게 한다.
이 책에는 ‘쓸모’가 있어야 한다는 우리 세상의 관점에 대해 사물의 입을 빌려 전하는 흥미로운 메시지가 몇 가지 더 나온다. “자네 인간들은 어디엔가 존재 이유가 있다고 생각되면, 다시 말해서 어디엔가 쓸모가 있다고 생각되면 안심하고, 아무 데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면 불안해한다. 내가 보기에 그건 참 딱한 병이다”라고 말하는 거울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아무것도 집고 있지 않은 ‘집게’에게 저자가 ‘쓸모’를 운운하자 “어째서 자네는 생각이 마냥 ‘쓸모’ 쪽으로만 치닫는가? ‘쓸모’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서 그렇게도 벗어날 수 없단 말인가?”라며 안타까워하고, 찻주전자는 “누구에게 쓰임을 받으려고, 세상에 필요한 존재가 되려고 안달하지 말게. 부디 자네한테 지금 있는 것으로 오늘 하루만 사시게”라고 위로한다.
그밖에도, 채 여물지 못한 채 비바람에 떨어진 아기 도토리에게 “중도에 꺾여버린 네 신세가 슬프지 않으냐?”고, 끊어진 빨랫줄을 보면서는 “소용없게 되었구나”, 빈 의자를 보고는 “쓸쓸하겠구나” 짐작하며 건넨 저자의 생각들은 매번 의외의 대답들로 하나씩 깨져 나간다. 마치 결핍과 두려움과 불안함과 외로움, 쓸모에 집착하거나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빠져 있는 에고를 깨우는 ‘참나’의 일침 같다. 결국 사물과의 대화를 통해 저자는 ‘내 생각, 내 판단’을 비울 때, 사물들의 말을, 아니 내 안에 있는 참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물들의 입을 빌려 전하는 이현주 목사의 오랜 마음 공부 이야기
이현주 목사와 친구로서 막역하게 지냈던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은 살아생전 이현주 목사의 글에 이런 글을 붙여주었다. “이 사람의 말은 그냥 말이 아니다. 끊임없이 살피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고민하고 살피다 보면 우리는 우리를 돌아볼 수 있고 상대방의 고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겉모습도 속모습도 알아보게 되면 결국 상대란 것은 없어지고, 너도 나도 아닌 우리가 된다. 하느님도 부처님도 조그만 풀벌레도 나무 조각도 모두 하나가 된다. 그게 모두 하느님이고 부처님인 것이다.”
권정생 선생의 글처럼, 저자는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사물들이 ‘저마다의 모양을 하고 있는 무엇’이지만 결국 ‘자연’이고 ‘우주’이며, 또한 ‘나’임을 알아간다. 나뭇가지처럼 보이지만 실은 나무와 하나인 존재,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외롭고 불안한 존재처럼 보이지만 실은 사랑과 하나인 존재가 바로 ‘나’임을 계속해서 여러 사물들의 입을 통해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부채에게서는 이런 말을 듣는다. “그림자가 그림자로 존재하려면 먼저 빛이 있어야 한다. 그림자는 빛의 다른 표현이다. 마찬가지로 사랑 아닌 것도 사랑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이 세상에는 사랑의 표현 아닌 것이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것이 내가 나에게 드러내는 나의 모습이다. 그래서 내 일찍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하지 않았느냐?”(이 책, 78쪽)
또 “어떻게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 저자에게 휴대용 빗은 이런 말을 들려준다. “나처럼 하면 된다. 나는 내 몸을 몽땅 너에게 맡겼다. 나는 온전히 네 것이다. 너는 나를 부러뜨릴 수도 있고 잃어버릴 수도 있고 잘 간직하여 머리를 빗을 때마다 사용할 수도 있다. 네가 나를 어떻게 하든 나는 상관치 않는다. 그것이 내가 너를 사랑하는 길이다. 너는 누구 것인가? 너를 가진 너는 어디 있는가? 지금 네 앞에 있는 사물에서 그를 보지 못한다면 너는 끝내 그를 만나지 못하고 말 것이다.”(이 책, 150쪽)
이 책의 마지막 대화 상대인 ‘포도 뼈다귀’ 역시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자네가 우주와 한 몸임을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자네는 우주와 한 몸”이라며 그러니 우리가 있을 곳 또한 하늘나라밖에 없다고, 가고 싶어도 갈 만한 다른 데가 없는 마당에 새삼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염려하냐며 “걱정하지 말고 겁내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특히 조바심내지 말라”고 다독인다.(이 책, 191쪽)
저자는 포도 뼈다귀와의 긴 대화 끝에 떠올린 선문답禪問答으로 책을 맺는다.
“스승님, 두려워서 못 살겠습니다.”
“무엇이 두려우냐?”
“세상에 아무도 없고 저 혼자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도 없고 너 혼자 있는데 무엇이 두렵단 말이냐?”
사물들의 입을 빌려 전하는 이현주 목사의 오랜 마음공부 이야기 50편. 삶이 두렵고 조바심 나는 날이면 가만 펼쳐 보자. 그리고 “내가 귀를 열면 돌이 입을 연다. 그래서 그 입이 하는 말을 그 귀가 듣는다”고 표현한 저자의 말처럼 우리도 가만 귀를 열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