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모두 무너진 채로 버텼다
상처받은 이들의 고통, 지워지지 않는 이야기
『상처』는 상처 입은 개인들이 어떻게 삶을 견디고, 이어 가고, 또 서로에게 작지만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지를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따라가는 장편소설이다.
1980년대 초반, 삼청교육대와 독재 정권이라는 시대의 그림자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가정이 붕괴된 여고생, 사회로부터 밀려난 청년, 책임감과 후회 사이에서 방황하는 부모-이들이 만나는 장소는 시골 마을 ‘매향리’다. 이야기는 마치 서늘한 봄날의 바람처럼, 격정적이기보다 덤덤하게 흐른다. 고아로 자란 청년 ‘준서’는 삼청교육대를 피해 우연히 이 마을에 들어와, 이사 온 여고생 ‘현주’의 가족을 멀리서 지켜보게 된다. 겉으로는 조용한 농촌의 일상이지만, 그 속에는 알코올 중독과 도박으로 무너진 아버지, 현실을 견디기 위해 수면제에 의존하는 어머니, 학교와 가정 사이에서 버텨야 하는 딸의 고통이 숨겨져 있다.
준서와 현주의 관계는 말없이 엇갈리면서도 미묘하게 얽히고, 마을이라는 배경은 이들의 작은 선택들이 남기는 파문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이 소설은 시대와 세대, 가족과 개인, 그리고 현실과 도피 사이의 경계 위에 선 인물들을 통해, 상처가 한 사람의 인생에 어떻게 새겨지는지를 담담하게 보여 준다. 하지만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그 고통을 견디며 ‘살아낸다는 것’의 의미에 있다.
누군가는 도망치고, 누군가는 참고, 누군가는 쓰러진다. 하지만 결국 이들은 모두 한 시대를 살았다. 그리고 이 소설은 바로 그 생의 기록이다. 『상처』는 묻는다. “상처는 지워지는가, 아니면 남은 채 살아가는가.”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어쩌면,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읽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