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이클러는 또 다른 청구서나 다름없었다.
리사이클러가 된다는 것은
전기련에게 진 빚을 죽어서도 갚아 나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세계를 덮친 멸망의 파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도시 서울. 서울의 통치권을 거머쥔 ‘전국기업인연합(전기련)’은 새로운 형태의 도시국가 ‘뉴소울시티’를 세우고 철저한 계급통치의 시작을 알린다.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영원불멸의 생을 누리는 1구역과, 1구역 보위를 위한 한낱 부속품으로 전락해버린 2구역. 공고해진 계급 차이만큼 두 지역 사이의 장벽도 높아졌다. 응급 상황 시 출동해 사고를 수습하는 ‘비상 대응 특수팀’의 복무 강령을 보면 ‘우리’로 대표되는 2구역 사람들이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일하는지 여실히 알 수 있다.
첫째, 우리는 전기련을 완벽하게 보위한다.
둘째, 우리는 전기련의 자산을 보호한다.
셋째, 우리는 전기련의 지시에 복종한다. _본문 중에서
한편, 비상 대응 특수팀 소속 청년 동운은 췌장암 4기 진단을 받고 깊은 절망에 빠졌다. 길어야 6개월이라고 했다. 췌장암 진단을 받은 후 동운은 병마와의 사투도,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병원비도,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의 수렁도 모두 무섭고 두렵지만, ‘리사이클러가 되는 것’을 제안한 의사의 말에 더더욱 충격을 받았다. 리사이클러라니, 리사이클러는 ‘재활용 인간’이란 뜻으로, 노동력 확보를 위해 전기련이 하층민의 몸을 재활용해 만든 것이었다. 그들 역시 과거엔 인간이었지만 지금은 인간의 외형만 가지고 있을 뿐 뇌 속 칩에 저장된 매뉴얼대로만 움직이는 생체 로봇에 불과했다. 그들은 어떠한 감정도 의지도 없이 오직 주인의 명령에만 복종할 뿐이었고, 인간이 할 수 없거나 위험한 일들─건설 현장이나 화재 현장, 용광로에서의 업무, 송신탑 수리, 수중 업무 등─을 대리해주거나, 혹은, 그저 사람들의 화풀이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리사이클러가 되라니. 리사이클러가 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의사의 무례한 말을 떨치지 못하고 내내 분노하던 그때, 동운은 리사이클러 수리 기사로부터 솔깃한 말을 듣게 된다. 1구역 사람들이 모두 집에 하나씩 갖고 있다는 은색 가방. 불로초 같은 약물이 든 그 가방만 있다면 온몸의 세포가 리셋되어 어떠한 병도 고칠 수 있다고 했다. 그것만 있다면 동운도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 그것만 있다면…….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보안이 철저한 1구역에 잠입해 가방을 손에 넣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재수 옴 붙은 날이었습니다.”
도발적인 읊조림이 불러온 그날에 대한 끔찍한 기억
며칠 뒤 동운은 낡은 리사이클러를 처분하고 새 리사이클러를 구매했다. 어차피 6개월밖에 안 남은 인생, 병원비와 약값을 충당하기도 버거웠지만 리사이클러가 없으면 진짜 목숨을 걸고 일해야 했기에 방법이 없었다. 동운은 살고 싶었다. 시간만 허락된다면 오래오래. 삶에 대한 욕망과 의지를 번뜩이던 동운은 새 리사이클러에게 ‘쓸모 있는 시간’이라는 뜻의 ‘기한’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검은색 슈트를 입고 얼굴 전체를 덮는 헬멧을 쓴 기한은 여느 리사이클러와 다르지 않아 보였지만, 유난히 고된 화재 진압을 마치고 화마가 휩쓴 건물을 빠져나가던 어느 날, 그가 내뱉은 한마디는 동운의 피를 얼어붙게 했다. 그것은 기한 앞에서 흘린 적도 없고 지시한 적은 더더욱 없는, 오로지 동운 자신만 알고 있던 과거 추악한 악행과 관련된 말이었기 때문이다. 동운과 기한을 태운 헬기가 죽음의 아수라장을 빠져나가는 순간, 동운은 살았다는 안도감보다 심장이 요동치는 아찔함을 느꼈다.
-네. 완전 재수 옴 붙은 날이었습니다.
아까 먹은 약 때문에 정신이 몽롱했지만 동운은 분명히 들었다. 누군가 재수 옴 붙은 날이라고 대답했다. 누가 대답한 걸까? 설마 기한이? 헬기 밑에 깔린 검은 연기 속으로 빨려가던 동운은 혼란스러웠다. _본문 중에서
전기련에 대항해 모든 시민들의 평등을 주장하는 저항세력의 활동이 더욱 과감해지며 도시는 날로 흉흉해진다. 전기련은 ‘저항세력 색출’이라는 명목으로 감사팀을 파견해 동운을 포함한 모든 직원들을 면담하기 시작하고, 동운은 기한과의 대화 기록으로 인해 괜한 트집을 잡히지 않을까 지레 겁을 먹고 면담에 임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감사팀 선임대리는 동운의 병명과 그에게 남은 기간 등, 그의 개인적인 비밀들을 열거하며 그것을 볼모로 동운이 차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한다. 비상 대응 특수팀으로 위장한 저항세력의 일원을 ‘확실한 증거’와 함께 찾아오면 동운의 육체를 새로운 육체로 바꿀 수 있는 ‘착복식’의 기회를 주겠다는 것. 착복식이라는 말에 동운의 눈빛이 바뀐다. 착복식만 하면 지긋지긋한 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젊고 건강한 몸으로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의심 가는 동료가 있다. 지금 동운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삶이다. 착복식의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 이대로 죽어서 리사이클러가 될 수는 없다. 모두가 잠든 그날 밤, 동운은 준비를 마치고 동료의 집으로 향한다. 확실한 증거를 찾기 위해.
꾸준한 집필로 파고든, 기술과 인간, 도시에 대한 성찰
이기원 디스토리아 트릴로지, 마침내 대단원!
『리사이클러』는 ‘이기원 디스토피아 트릴로지’의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이다.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미래도시와 획기적인 의학의 발전으로 영원불멸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얼핏 들으면 유토피아 같은 이곳이 정말 진정한 천국일지, 기술에 대한 성찰 없는 발전은 과연 인류를 어떤 세상에 데려다놓을지, 디스토피아 트릴로지의 전체 시리즈는 이러한 질문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리사이클러』에만 실린 「작가의 말」을 보면 이기원 작가가 어떠한 질문을 통해 각각의 작품을 집필했는지를 알 수 있다.
죽음이 없는 세상은 정말로 낙원일까? 죽음이 사라진다는 것이 곧 영원한 고통 속에 머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에서 첫 작품인 『쥐독』이 시작되었고, 인공지능이 완벽한 정의를 이뤄줄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에 수사물의 외피를 두른 것이 『사사기』의 발단이 되었다. 그리고 인간이 사회 시스템의 소모품으로 전락한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한 것이 『리사이클러』로 남았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과 그에 대한 심층적이고 진실된 대답, 그리고 작가의 SF적 상상력이 결국 이 시리즈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앞으로 이기원 작가는 또 어떤 것에 관심을 가지고 질문을 이어가게 될까? 작가가 다음으로 눈을 돌릴 세계는 어떤 모습일지, 작가로서 앞으로의 활동이 더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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