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위에 피어난 미술: 전후 시대의 미학적 도전
1945년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홀로코스트의 참상이 드러난 이래로, 예술은 존재 자체의 정당성을 묻는 근본적 위기에 직면했다. 아도르노가 말한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는 선언은 예술의 존재 방식에 대한 질문을 던졌고, 이 질문은 지금까지도 현대미술의 밑바탕에 흐르고 있다. 데이비드 홉킨스의 『1945년 이후 현대미술』은 이러한 파괴적 현실에서 출발한 예술의 새로운 여정을 섬세하게 추적한다.
홉킨스는 전후 아방가르드를 “도전적이고 선동적이며 난해한” 예술로 규정하면서도, 이것이 단순한 형식 실험이 아닌 시대적 저항의 표현임을 강조한다. 그는 미국 중심의 모더니즘 서사에서 벗어나 유럽과 미국 예술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면밀히 분석하며,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형식주의와 마르셀 뒤샹의 개념적 접근이라는 두 축 사이에서 현대미술이 어떻게 자신의 길을 모색해 왔는지 보여준다.
특히 이 책은 추상 표현주의가 냉전이라는 정치적 맥락과 어떻게 얽혀 있었는지, 팝아트가 어떻게 소비문화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공모였는지, 미니멀리즘이 어떻게 관람자의 신체적 경험을 재구성했는지, 개념미술이 어떻게 예술의 물질적 토대를 해체했는지를 깊이 있게 분석한다. 홉킨스는 예술 작품을 단순히 미학적 대상으로 다루는 대신, 그것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조건을 함께 고찰함으로써 현대미술의 복잡한 지형도를 그려낸다.
글로벌 시대의 미술: 테러와 디지털 네트워크의 충격
2001년 9월 11일 알카에다의 뉴욕 테러는 현대미술에 또 하나의 중대한 변화를 일으켰다. 데이미언 허스트가 “이 사건은 일종의 예술작품... 시각적으로 고안된 충격”이라고 논란적으로 발언했듯이, 이 사건은 21세기 시각 문화의 변화를 예고했다. 홉킨스는 이 사건 이후 현대미술이 테러리즘, 감시 체제, 디아스포라, 국경과 정체성의 문제에 어떻게 반응해 왔는지를 예리하게 포착한다.
디지털 기술과 인터넷의 확산은 예술 생산과 유통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홉킨스는 인터넷 아트, 관계적 미학, 참여 예술 등 새로운 실천들이 어떻게 전통적인 예술 제도와 시장의 논리에 도전하면서도 그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협상해 왔는지 분석한다. 특히 타냐 오스토이치, etoy 같은 사례를 통해 디지털 네트워크가 어떻게 새로운 정치적 개입의 장이 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홉킨스는 현대미술이 “단지 재현의 위기 속에서 고립된 것이 아니라, 세계화 시대의 불균형과 충돌 속에서 그 의미와 역할을 재정의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미술관, 비엔날레, 아트페어로 구성된 글로벌 미술 시스템의 확장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권력 관계의 재편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면서, 현대미술이 이러한 조건 속에서 어떻게 저항과 비판의 가능성을 모색하는지 섬세하게 그려낸다.
이 책은 단순한 미술사적 서술을 넘어 현대미술을 통해 우리 시대의 정치적, 윤리적, 미학적 질문들을 제기하는 지적 여정이다. 홉킨스의 깊이 있는 분석은 혼란스러워 보이는 현대미술의 지형 속에서 길을 찾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필수적인 안내서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현대미술이 단순히 난해한 형식 실험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와 그 안에서의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임을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