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아동문학, 수필, 소설 등의 장르를 넘나들며 왕성한 작품활동을 해온 조진태 작가의 소설집으로 9편의 신작 단편을 싣고 있다. 인간 삶의 구석구석을 유심히 관조한 사회현실 비판과 미래 지향의 인간 창조의 작품을 집필해온 작가는 이번 소설집 『소멸하는 파도波濤』에서도 역시 그러한 색채를 짙게 드러내고 있다. 정과 부정, 참과 거짓, 선과 악, 빈과 부, 지배자와 피지배자 등이 다양하게 공존하는 세상살이에 대한 작가의 냉정하고도 핍진한 시선이 응축되어 형상화하고 있다.
표제작인 「소멸하는 파도波濤」는 아내와 사별한 차형주 씨의 아득한 고통의 시간과 일천억이 넘는 재산가인 그의 노년을 그리고 있다. 88살 차형주 씨의 7형제 5자매 자식들의 모습과 사연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파도가 쉴 새 없이 치는구나. 천 년이고 만 년이고 그렇게 쳐왔건만, 앞으로도 쉬지 않고 저러겠지. 노도는 굽 높게 칠 것이고, 잔잔한 파도는 그 나름대로 부딪치되 소멸되기는 마찬가지일 거야. 아우성만 있는 외침, 독 묻은 언어, 상처받은 사랑, 금이 간 정, 그 어느 것 하나도 남김없이 저 철썩이는 파도 속에 던져 버릴 수만 있다면 그래서 소멸되는 파도처럼 흔적도 없게.”라는 문장은 차형주 씨의 연륜만큼 깊은 인생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당숙」은 퇴직금으로 시골에 땅과 집을 마련하고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당숙 내외로부터 운동권 학생이었던 준혁이 그 농토를 이어받아 농사를 지으면서 그의 삶과 유지를 지키는 이야기로, 어두운 시대에 소외된 사람의 삶을 진솔하게 그리고 있다. 당숙 내외가 남긴 유서의 여운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이 세상 너무 오래 머물러 치매라도 걸릴까 두려워 우리 함께 먼저 간다. 양지바른 찔레꽃 피는 언덕바지에 우리 내외 나란히 묻어다오.’
「꿈엔들 잊힐리랴」는 사범학교 재학 시절을 떠올리는 화자의 기억과 김규병 교수에 대한 형상이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으로 인간은 진정 본성을 개조할 수 없다는 이야기로 자신의 삶을 반추하게 만드는 힘이 짙다.
「무정세월無情歲月」은 김향산이 고향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서사가 시작된다. 그 여정 속에서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수많은 고향 사람들 가운데 특히 ‘이주사’의 실루엣이 강렬하게 떠오른다. 해방 다음 해, 김향산이 십오 세 때 숙부를 따라 들렀던 방앗간에서 만났던 낯선 사람이 바로 이주사였다. 그는 부자인 오팔문 씨 집의 머슴 겸 방앗간 일을 도맡아 하는 오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그와 그를 둘러싼 마을 사람들의 초상을 통해 해방 후 좌·우의 실상을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안개 속으로」는 자실 직전에 살아난 소영이 몇 년 후 자신이 자살하려던 바로 그 장소에서 죽으려는 김창수를 살린다. 김창수는 소영의 뒷바라지로 고시에 합격해 검사가 된다. 하지만 소영을 외면하고 상생의 의리를 저버리며 혼자만의 복과 영광을 누린다. 이런 김창수에 대한 단죄와 함께 소영도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적 이야기이다.
「어떤 유산」은 복권에 당첨된 돈 때문에 아내마저 잃을 뻔했던 김백만이 결국 외국으로 이민을 떠나는 이야기로, 돈 때문에 고민하는 오늘날 인간들이 비본연의 자세에서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기를 염원하고 희구하는 휴머니즘이 짙게 배어있는 작품이다.
「창밖의 무지개」는 남편은 출근하고 아이들은 학교에 간 후에 문득 중년을 느낀 여인의 내면 심리와 그에 따르는 충격적인 행동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창밖의 비는 소리 없이 뿌려지는데, 지난날의 환희는 어디로 사라지고 포악스런 고통만이 자책과 회한이 범벅된 채 가슴 가득 차올라왔다’는 여인 내면의 울부짖음이 오래도록 귓전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흔들리는 황혼」은 아내와 사별한 김시형 박사의 집에 석나미 여사가 도우미로 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의 지혜를 들려주고 있다.
「순간의 선택이」는 오랫동안 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옥당선생이 강조한 ‘순간의 선택이 백 년의 친구다’라는 한마디 때문에 부부의 인연을 맺은 제자들의 사연을 재미있게 서술하고 있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순간의 선택이’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맛깔스럽게 들려준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소설집에서 아내의 부재로 평소에 느껴보지 못하는 사실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는 화자들이 많다. 눈여겨보면 이 소설집에서 ‘부재’는 ‘아내’의 부재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오면서 인생에서 자꾸 잊히고 부재하는 원래적이고도 생래적인 인간성에 대한 강조의 무게로 다가온다. 인간은 어떤 대상이나 사물의 부재에서 비로소 평범하게 느껴지던 일상성의 껍질이 벗겨지면서 속내가 들여다보인다. 그러면서 그것이 어째서 그토록 소중하며 또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를 찾아가는 것이 이 소설의 여정이다. 그것이 조진태 작가의 소설 『소멸하는 파도波濤』의 참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