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와 소통을 넘어서 외부의 타자가 아니라
내면의 타자를 대면하는 사유와 깨달음의 기록
일본의 문화인류학자인 이노세 고헤이는 갑자기 집을 나가버린 자폐와 지적 장애를 가진 형을 쫓으면서 이 사건이 단순한 실종이 아니라 어떤 가능성을 향한 질주임을 깨닫는다. 저자는 이 경험을 ‘싯소しっそう’, 즉 질주이자 실종이라 명명한다(일본어에서 실종疾走과 질주失踪는 발음이 같은데 이를 히라가나로 표기한 것). 《야생의 실종》(원제:野生のしっそう)은 그 ‘싯소’에 관한 이야기다. 삶과 몸, 세계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질문 속에서, 존재와 타자 그리고 세계의 관계를 사유하는 한 인류학자의 실존적 탐구이다.
어린 시절, 저자는 형이 ‘장애인’으로 분류되는 순간을 경험한다. 자폐와 지적 장애라는 진단이 붙고, 형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특수학교로 보내야 하는 제약이 생긴다. 형은 ‘보통의 형’이 아닌 ‘돌봄이 필요한 존재’로 바뀌며, 저자와 형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절단선이 생긴다. 세상이 형을 장애인이라 부르기 시작했을 때, 저자는 그것이 세상이 타자를 다루는 방식의 단면임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사회와 규범이 만들어낸 분리의 선을 인식하면서부터 저자는 형을 주제로 장애인류학 연구를 시작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학문적 시선조차 형과 자신 사이를 가르는 절단선을 지우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된다.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 문화인류학의 ‘거리두기’로는 가장 가까우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형이라는 타자의 존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결국 저자는 객관적 시선을 유지하는 대신 실종된 형을 뒤쫓는 여정을 그대로 기록하기 시작한다.
《야생의 실종》은 인류학에서 상정하는 ‘외부의 타자’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적 경험과 사유의 기록이다. 학문적 거리두기나 객관적 분석 대신 저자는 동생으로서 형을 쫓으면서 형과 형이 살아가는 세계를 경험하고 사유한다.
이성과 구조에서 경험과 감각으로,
세계를 가로지르는 야생과의 동행
인류학의 고전 《야생의 사고》에서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원시부족에게도 서구문명과 동등한 체계화된 구조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야생의 실종》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이노세 고헤이는 야생의 ‘구조’가 아닌, 개별적 존재의 고유한 진동을 사유의 시작점으로 삼는다. 형의 질주와 외침, 묵언들은 분석 가능한 ‘구조’가 아니라, 해석을 거부하는 몸의 ‘신호’이자 감각이 된다. 구조가 아닌 개인의 경험, 분류가 아닌 접촉, 해석이 아닌 동행을 통해 형이 살아가는 세계와 연결될 수 있다. 종국적으로 우리가 ‘타자’라고 부르는 존재와 ‘이해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어떻게 함께 살 수 있을지를 모색한다.
책에는 코로나 팬데믹에서 도쿄올림픽과 패럴림픽, 장애인 복지시설에서의 집단 살상 사건까지, 일본 사회를 뒤흔든 다양한 사건들이 등장한다. 세계의 공고한 구조를 상징하는 이 사건들이 형의 ‘싯소’와 맞물려 저자의 일상에 균열을 일으키고, 비로소 저자는 그동안 몰랐던 사회가 만들어놓은 경계선들을 발견하게 된다. 형이 마스크 없이 거리로 뛰쳐나가는 ‘실종’은 사회에서는 한 장애인의 방역수칙 위반 문제에 불과하지만, ‘질주’로 인식하는 순간 그 행동은 사회가 규정한 정상성과 통제의 체제를 뒤흔드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책은 세 개의 선을 따라 전개된다. 첫 번째는 형의 실종과 질주라는 ‘현실의 선’, 두 번째는 그것을 따라가며 사유하는 저자의 ‘인식의 선’, 세 번째는 그 모든 것의 배경이 되는 사회와 국가가 만들어내는 ‘구조의 선’이다. 저자는 이 선들이 만나는 접점을 따라가며, 우리가 인지하지 못했던 일상 속 선들과 세계의 단절을 발견하고, 단절된 세계들을 다시 잇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 사유는 장애를 넘어 가족과의 관계, 그리고 늙음으로 확장된다. 노쇠는 장애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타자성을 드러낸다. 어린 시절 신축 단지였던 본가가 이제는 개보수가 절실한 낡은 구축이 되어버리듯, 아버지는 점점 움직임이 느려지고, 낯설어지고,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해지면서 점점 타자가 된다. 저자는 형과 아버지의 동거를 통해 전통적인 가족의 부활을 기대해 보지만 그런 기대조차도 형과 아버지를 타자화시킨 자신의 헛된 바람이었음을 깨닫는다.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에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타자를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이해를 통해 함께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설명을 통해, 공감을 통해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런 생각에는 타자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다는 오만이 깃들어 있다. 《야생의 실종》은 그 믿음을 단호하게 깨버린다. 이해했다는 착각,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은 관계의 전제가 아니라, 관계를 가로막는 장애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시행착오 끝에, 형을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 고유한 질서, 감각의 언어로 받아들인다. 그런 의미에서 공존은 완전한 이해의 결과가 아니라 불완전한 연결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것이다. 저자는 끝내 형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이 자폐인 형과 문화인류학자 동생이 함께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어쩌면 서로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함께 살아갈 수 있다. 공존할 수 있다. 마침내 ‘싯소’한 형을 발견하고 함께 돌아오는 저자의 여정처럼.
단절된 시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게 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야생의 실종》은 마지막으로 묻는다.
“우리는 정말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연결될 수 있을까?”
그 질문이 닿는 곳에서 서로의 세계는 다시 연결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