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자리의 존재들이다. 그런데...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자리의 존재들이다. 한자리에 있으면서도 더 깊이 뿌리 내리기 위해 땅속을 파고드는 식물도 마찬가지고, 살아 움직이는 생명들은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더 나은 생존의 자리를 찾아 기꺼이 이동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간 역시 유한한 몸을 지니고 있기에 공간과 장소가 필요하지만, 인간 실존의 경우 자리는 단순한 생존의 차원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사회 내 존재로서 우리는 어딘가에서 무엇으로 자리 잡아야 하고, 더불어 영혼을 지니고 있기에 역할과 정체성을 차지해야 한다. “뿌리 내림은 가장 중요하면서도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는 인간 영혼의 욕구”라는 시몬 베유의 말처럼, 인간은 마음 깊은 곳에 실존의 깊이와 충일을 실감할 수 있는 자리에 닿고자 하는 포기할 수 없는 갈망과 고뇌를 지니고 있지만, 진정한 뿌리 내림을 위해서 뿌리 뽑힘을 감수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회적 존재로서 우리가 맞닥뜨려야 할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다. 한마디로 자리의 문제는 우리의 의지를 벗어난 것으로 느껴지고,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고, 자산이 아니라 외부적 조건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때문에 대부분의 우리는 어릴 적부터 “제 분수를 알아야” 하고 “현재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자란다. 안 그러면 지금의 자리에서도 내침을 당하고 불행해질 테니까. “당신이 사는 아파트가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준다”는 광고 문구를 삶의 격언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그래서 자리를 둘러싼 전쟁은 현재진행형이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 치열한 전쟁터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자리(장소)는 중립적이지도 평등하지도 않다. 인간에게 자리는 지리적·계층적·사회적·정치적 자리이며, 위치에 따라 의식의 내면의 색조가 달라지고 부침을 거듭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젠더·계급·인종·종교 등을 이유로 배제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적대적인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얻기 위해 맞서 싸우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적·정치적 제도가 바뀐다고 해서 자리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할 수 없다. 정치적 유토피아는 평등한 자리의 분배를 약속할 뿐 인간 존재의 다양한 차원에 대해 이야기하는 바는 없다. 자리가 인간의 실존과 일치한다는 생각은 환상이고 일종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말은 과거에는 계급의식을 일깨우는 언명이었지만 이제는 자본주의의 명제로 더 빈번히 사용된다. 앞서의 아파트 광고처럼. 질서 정연하고 계획된 세계에선 자리가 개개인의 인격과 가치를 온전히 반영할 수 있다는 주장은 인간 존재에 대한 몰이해이고 착각이다. 우리는 삶이 유지되기를 바랄 뿐 아니라 삶이 영위되기를 바란다. 어떤 자리에 있다고 해서 자신이 제자리에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제자리에 있다”는 감각은 실존의 여러 요소가 만들어 내는 일치의 음악 같은 것이어서 오로지 자신만이 알 수 있다.
우리는 반복적이고 습관적인 자리에 안도하면서도 동시에 그 질서에 갇힌다는 생각으로 불안해한다. 사회적 목록의 일원이라는 점에 안도하면서도, 하나의 계열에 기입된다는 것은 우리가 대체 가능하다는 의미한다는 사실 앞에서 경악한다. “이 세상은 당신을 위해 어떤 공간도 만들지 않았다”고 위협하며 언제든 인간은 대체될 수 있는 노동 상품이라고 대놓고 이야기하는 현실에서 실존의 충일함을 희구하는 제자리 찾기는 가능할까.
모든 순간을 예측할 수 있을 때, 삶의 게임이 어떻게 플레이될지 정해져 있을 때,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 게임을 하고 싶을까?
우리는 안정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곳, 범할 수 없는 곳, 준거점이자 출발점, 근원이 되어줄 장소를 염원하지만, 이런 장소들은 이 세계에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를 기다리는 자리, 우리에게 맞춤한 제자리, 그런 건 애초에 없다. 고정된 자리는 실상 없으며, 안정적 자리라는 환상은 끊임없이 전치되고 응축되기를 반복한다. 우리를 기다리는 건 사회가 설정한 분류법에 따라 할당한 자리들이다. 모두가 “제자리를 지켜야”하는 “정상적인” 세계에는 폭력성이 내장되어 있다. 자신만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기에 자리(공간)는 질문이 되고 의심이 된다. 우리는 이 세계의 질서에 기입되기 위해 어떤 왜곡이 필요했을까? 어떤 부자연스러운 연기와 책략이 필요했을까? 우리는 자신에게 배정된 자리에 고정되어 오그라들고 줄어들기를 강요받는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했을 때, 더듬거리는 실존의 굴욕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잘 맞는 세계라는 환상에 머물 때보다 냉담하고 척박한 자리에 있을 때 우리의 실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우며 그때 비로소 자리게임의 대상이 아닌 타자들의 삶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왜 어떤 사람들은 한자리에 고정되지 않고 떠나려 하는가? 그런 의문을 가질 때 우리는 스스로를 퍼즐의 작은 조각으로 생각했던 자신에 대한 의문이 싹튼다. 자신의 자리에서 호흡이 불편해지고 자신이 멜로디 속 잘못된 음표 하나, 기계장치에 끼어든 모래알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하기 시작한다.
떠나려는 사람들은 어렴풋하지만 거의 육체적인 느낌으로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음을 안다. 이 몸짓은 일견 잔인한 것이지만, 그것은 존재의 이기심을 넘어선다. 평온함과 친숙함 속에 웅크린 채 그에 안주했던 자신으로부터 몸을 일으키려 할 때, 축소된 세계의 제한된 실존에 만족하지 않고 다른 삶의 가능성을 향해 발을 내딛으려 할 때, 그는 자리 옮김이 가져올 공간의 시련들을 감수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리 옮김이 가져올 위험을 예감한다. 그들은 표류하고 좌초하고, 계급 횡단자나 이주자처럼 이중 삼중의 고립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가 그 속에서 길을 잃는 것을 두려워할 것인가? 어쩌면 우리는 꿈속에 있을 때 깨어 있을 때보다 더 살아 있는지도 모른다. 이동하는 법을 잊고 있었을 뿐, 우리가 자리의 존재라는 것은 이동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재전유하기 위해서. 제자리에 있다는 느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행운과 끈기,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삶의 무질서와 화해하고 받아들일 때 새로운 유쾌한 조합과 비옥한 충돌들을 만나게 되니 말이다.
현실의 자리게임의 체스판에는 우리가 놓치는 움직임들이 있고, 말들을 쓰러뜨리는 돌풍이, 말들을 쓸어가 버리는 분노가 있다. 그러나 앞으로, 대각선으로, 혹은 뒤로 이동하는 자리 옮김이 없다면 게임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회나 갈림길이 없다면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나 자기 안에 방을 지닌다”고 카프카가 말했을 때, 그 방(자리)은 그 자체로 이러한 내적 운동들, 일시적인 충동, 집착의 동요와 충격을 모두 담는 곳이 아닌가?
철학이 시작되는 자리-끊임없이 움직이는 과정에서 제자리는 어떻게 발견되는가?
우리는 어떤 사회적 공간에 적응하지 않고서는 제자리를 찾을 수 없지만, 그러면서도 할당된 자리에서는 제자리에 있다고 느끼지 못하며, 삶을 살아가는 동안 계속 자리를 바꿔 나간다. 결국 자리의 문제는 자리 옮김의 문제인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클레르 마랭의 철학 에세이 『제자리에 있다는 것』은 오늘 세계의 현실과 거기에 놓인 우리의 실존이 겪는 첨예한 딜레마를 가로지르는 질문의 책이면서 바로 이 자리 옮김의 사유를 시작하기 위한 단서들을 우리 앞에 펼쳐 놓는다. 첫 테마에서부터 그녀는 정착민과 유목민을 나누는 것은 가짜 양자택일이라고 말한다. 뿌리 내림과 자리 옮김은 기계적으로 분리되거나 따로 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긴장 속에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언제나 하나의 여정이며, 머묾도 그 여정을 구성하는 정서·사회·지리·정치적 기착지일 뿐이다. 실제로 우리는 결코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모래 위를 걷는 존재이며, 사이의 존재여서 언제나 두 세계 사이, 두 시간성 사이, 자기 자신이 되는 두 가지 방식 사이에 있는지도 모른다. 철학이 존재하고, 존재해야 하는 까닭은 바로 이 사이에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은 표류와 전복을 겪으면서 미지의 땅에 좌초하는 순간에조차도 자기 자신에 대해 발견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 세계에 온전하게 머물 수 있는 나만의 자리는 존재하는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과정에서 제자리는 어떻게 발견되는가? 우리는 영역의 논리, 소속의 논리로 구조화된 공간 안에서도 제자리를 찾아내야 한다. 분별 있게 처신하라고 끊임없이 요구받을 때조차도 우리는 그러한 요구에 반하여 자신의 참된 차원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야 한다. 진정한 뿌리 내림을 위해서 뿌리 뽑힘을 감수하면서. 그것이 누구의 요구도 아닌 자기 내면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존재의 요구이기 때문에. 자신의 실존이 연주하는 일치의 음악을 듣기 위해서, 자신의 생애와 자신이 진심으로 화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제자리에 있다는 것”의 의미를 사유하는 여행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디에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자리 옮김의 사유’가 지니는 거의 모든 차원-사랑과 접촉, 관계의 문제까지를 포함하여-을 세심하게 검토하고 있는 이 빼어난 철학적·문학적 에세이가 각박한 세계에서도 자신만의 자리를 찾기를 희구하면서 동시에 그 자리가 타자를 향해 열려 있는 것이기를 바라는 독자들의 손에 닿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