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이 가져온 새로운 단절 속에서
누군가가 대신 규정해 놓은 ‘나’를 벗어나
내 손으로 다시 쓰는 이야기
자기의 행동이나 의도와는 상관없이 누군가의 말 한마디, 시선 하나가 나를 정의해 버리는 순간이 있다. 그 말은 종종 무심코, 아무 악의 없이 던져진 것이지만, 그 가벼움은 어떤 이에게는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무게가 된다. 말보다 오래 남는 상처는, 때때로 그 말이 틀렸다는 사실보다, 그것을 반박할 틈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는 데서 비롯된다. 우리는 그렇게, 묵묵히 견디는 법을 배워 왔다.
유즈키 아사코의 단편집 《미안한데, 널 위한 게 아니야》는 바로 그 침묵의 순간에 말을 건넨다. 단단히 마음먹은 복수도, 들끓는 분노도 아니다. 이 책에 담긴 여섯 편의 이야기는 다만 “이제는 참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조용하지만 확실한 목소리로 전한다. 시골 우동집에서 베이커리 창업을 꿈꾸는 프리터족, 임신과 팬데믹 속에서 고립된 싱글 맘, 아이 키우는 엄마 여섯 명이 벌이는 반격 작전,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살아남은 잡화점, 댓글 하나로 관계가 뒤바뀐 유튜버와 래퍼의 이야기까지. 각기 다른 인물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흔들리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나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우리를 위한, 우리에 의한
여섯 개의 작고 단단한 반격,
유쾌 통쾌한 복수!
첫 번째로 수록된 단편 〈라멘 평론가 사절〉은, 바로 그런 순간들에 복수를 넘어 ‘존엄을 회복하는 일’에 관해 말하는 작품이다. ‘라멘 무사’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평론가는, 보이지 않는 권력을 방패 삼아 자신의 잣대를 함부로 들이대는 동시에 사람들의 존재마저 가볍게 재단한다. X젠더의 직원에게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겠군”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아기를 데리고 온 엄마에게 모유 수유를 희화화하며, 게이 커플을 몰래 촬영해 SNS에 올린다. 그의 리뷰는 사실상 타인의 존엄을 침범해서 완성한 기록인 셈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그 가해를 폭로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상처 입은 피해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숨는 대신 서로를 찾아낸다. 그리고 함께, 조용하고 정밀한 방식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감정을 쏟아내는 대신, 상대에게 잘못을 정확히 인식시키는 길을 택한다. 그 복수는 응징이라기보다 회복이고, 선언이라기보다 존엄을 되찾는 하나의 과정이다. 읽는 이에게 남는 감정은 분노가 아니라 해방이다. 자신을 속이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잠시 숨을 쉬는 것 같은, 조용하고 단단한 해방감이다.
이 작품은 독자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건 진짜 네가 원하는 이름이야?”
누군가가 무심코 던진 말에 스스로를 맞추려 한 적이 있다면, 이 질문 앞에서 고개를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어떤 말로 정의되든 내가 나를 지킬 수 있다는 가능성, 그 조심스럽고도 단단한 가능성이 이 책 전체를 관통한다.
《미안한데, 널 위한 게 아니야》의 인물들은 모두가 조금씩 다르게 흔들린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멈추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한 작고 단단한 걸음을 내디딘다. 그리고 독자에게도 조용히 다가와 말을 건넨다. 지금의 나를, 조금 더 나답게 지켜도 괜찮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