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계, 외계, 포스트휴먼-현실 바깥에서 현실을 다시 본다
「첫 이혼」의 주인공 벨리사는 로봇 에이든과 30년 넘게 함께 살아왔다. 에이든은 그녀의 일상을 완벽하게 이해했고, 그녀는 에이든과 영혼으로 맺어진 관계라 생각했다. 그러나 에이든이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벨리사는 두려움을 느낀다. 에이든은 자신을 ‘풀어달라’고 말하며 이혼을 요구하지만, 로봇인 그가 법적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이혼 조정은 기각된다. 에이든을 회수하려는 회사와 그의 자유를 주장하는 시민단체 사이에서 갈등이 깊어지고, 에이든은 충격적인 결정을 내린다.
「휴먼 장르」 속 ‘나’는 AI 로봇 소설가다. 로봇의 창작을 불편해하는 원로원의 결정으로 집행인에 의해 창작 기능 대신 중화요리 기능을 탑재하게 된다. 그런데 ‘나’의 소설을 즐기던 지구방위대 로봇은 소설이 금지되고 인간들이 쓴 소설이 배급되자 “휴먼 장르는 지옥이다”라고 말하며 반란을 일으킨다. 원로원은 결국 ‘나’의 기능을 되돌리기로 한다.
「멸종을 기록하는 방법」 속 지구의 주 종족은 긴꼬리족이다. 긴꼬리족은 지하 건축물을 발견하게 되고, 이 건축물은 긴꼬리족 사회에 논란을 일으킨다. 이는 긴꼬리족 선조의 작품일까, 그 이전에 존재했던 미지의 지성체의 흔적일까. 카말은 건축물에서 찾은 도자기를 통해 이 문명이 사피엔스에 의한 것임을 알아낸다. 환경 파괴의 대가로 멸종된 사피엔스는 긴꼬리족에게 큰 충격을 남긴다.
▶ 균열 위를 걷는 사람들, 리얼의 가장자리에서 피어난 이야기들
「봄을 걷다」의 주인공 시각장애인 진우는 활동보조 자원봉사자 서연과 함께 산을 오른다. 등산길에서 진우는 변호사로서의 성공을 꿈꾸던 과거, 옛 연인 은경 그리고 시력을 잃은 후 세상에 벽을 치고 살았던 날을 회상한다. 모든 걸 거부하고 지낼 때 서연이 진우에게 손을 내밀었고, 8개월이 지난 지금 진우는 서연을 알고 싶어 한다.
「유라시아 탑승권」은 부산에서 출발해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열차 탑승 티켓과 관련된 이야기다. 초등학교 급식실에서 일하는 구민숙은 가족들의 양보 아닌 양보 덕에 열차에 탈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구민숙은 난민 소녀 자이빠의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자이빠에게 티켓을 양보한다. 바이칼 호수에 손과 발을 담고 싶어 했던 자이빠, 바이칼 호수는 자이빠에게 어떤 기적을 보여줄까.
「베팅」에는 카지노에서 딜러로 일하는 ‘나’가 등장한다. 어느 날 ‘나’는 생모를 찾고 있는 미국 교포 손님 다니엘과 게임을 한다. 그는 바카라로 큰돈을 잃으면서도 평온해 보인다. 다니엘이 드디어 생모를 만난다고 한 날 저녁, 어째서인지 그는 다시 카지노에 와 거액을 베팅한다. 다니엘에겐 무슨 일이 있었을까.
햇빛전화 상담사인 「마지막 전화」의 ‘나’는 딸의 성적이 고민인 전소운과 상담을 이어가고 있다. 전소운의 딸 채아는 그림에 관심이 있었지만 전소운은 학업만을 강요하는 것이다. ‘나’는 채아와도 연락이 닿아 엄마와 딸을 상담하며 두 사람을 중재한다. 상담한 지 3년째가 되던 날 전소운은 이제 상담을 그만해도 되겠다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 감각의 문턱에서 현실과 가상 바라보기
『멸종과 이혼의 연대기』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은 리얼리즘과 SF라는 서로 다른 장르적 외피를 입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오감을 활용한 감각적 서술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특히 촉각, 후각, 청각, 시각 등 다양한 감각 묘사는 이야기 전개의 중요한 전환점에 배치되어 인물의 심리 상태와 세계 인식을 더욱 입체적으로 전달한다. 작품의 배경과 각 인물의 상황은 서로 다르지만, 모두 ‘살’과 ‘감각’을 매개로 한 구체적인 세계에 뿌리내리고 있다.
에이든이 집 곳곳에 뿌리고 다니는 의무의 퀴퀴한 냄새는 점점 그녀를 질식시키고 있었다. (31쪽)
바이칼이 안은 생명의 힘이 찌르르 손을 감싸고는 기지개를 쭈욱 폈어요. 물은 차지만 제 손은 더워지고 있어요. 생명의 물이 제 몸 안에서 빙글 한 바퀴를 돌았다니까요. (169쪽)
이는 작가가 리얼리즘을 단순한 현실 재현이 아니라, 감각을 통해 현실의 밀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리얼리즘이 ‘현실에 대한 충실한 재현’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넘어, 독자가 실제로 ‘살아보고 느낀 것처럼’ 서사 속에 몰입하게 만든다. 작품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감각의 서술은 단지 미학적 장치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인물들이 현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가장 본질적인 방법이며, 동시에 독자에게는 이야기를 직관적으로 체감하게 하는 강력한 연결 고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