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기억은 안전한가?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렌즈》 속 첨단 기술의 이면에 드리운 그림자를 잘 드러낸다. 《렌즈》에서 기억은 더 이상 개인의 것이 아니다. 돈과 권력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다크웹상에서 경매의 대상일 뿐이다. 첨단 기술이 ‘모두가 부러워하는 잘난 삶을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과 결합하면 어떤 끔찍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고 싶거든, 이 소설을 집어 들라.
터텀(Tutum)국, 렌즈 삽입술, 채람 코퍼레이션, 경험 경매…
‘경험의 상품화’라는 독창적인 세계관 창조!
작가는 지명과 나라 이름이 라틴어로 구성된 ‘터텀’이란 완전히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디스토피아적 공간인 터텀국은 그러나, 어찌 보면 전 세계의 축약본이다. AI와 인류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고, 사람들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지배를 받으며, 범죄율은 치솟는. 아이러니하게도 라틴어인 ‘터텀’은 ‘안전한’이라는 뜻이다.
중범죄율이 70%를 웃돌고 경찰에 대한 신임도는 30점이 안 되는, 겨울과 어둠이 긴 터텀국에 작가는 새로운 엔터테이닝 사업을 등장시킨다. 그것은 바로 경험을 사고 팔 수 있는 렌즈! 채람 렌즈를 눈에 삽입하면 기억이 기록되는데, 그 기억 속 감정을 AI 채람이 분석하고 복제한 뒤 채람 플레이어로 전달한다. 마침내 경험 구매자가 플레이어에 들어가 마스크를 쓰면 타인의 경험을 입어볼 수 있다. 채람 코퍼레이션 CEO는 “타인의 승리 경험을 옷 입듯 입어봄으로써 패자가 아닌 승자의 마인드를 가질 수 있다.”며 경험 거래를 정당화한다.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 압도적인 몰입도!
- “거기엔 우주의 지난 3년이 담겨 있습니다. 걔 경험을 탐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이야기는 세계적인 UFC 선수이자 경험 판매 1위인 파이터 정우주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호텔 밀실에서 안구가 적출되어 렌즈 속 기억을 도난당한 채 발견된 정우주의 죽음 이후 경찰청장은 특별 수사본부를 꾸린다. 렌즈 보안과에서 고위층의 성 경험 불법 유통 사건을 맡던 주인공 이노아 형사는 곧바로 수사본부로 발령 난다. 그 발령에는 어딘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지만, 정우주 사건을 해결해 장기 미제 사건 수사 전담팀으로 가는 것이 목표인 노아는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렌즈 삽입 반대 시위 주동자이자, 렌즈 보안과 팀장, 백색증 형사 이노아
- “사형수라. 멋진 자기소개군. 루지를 찾는 날 그는 미련 없이 총으로 머리통을 날려버릴 예정이었다.”
독자들은 주인공 이노아에게 금방 매료될 것이다. 노인처럼 센 백발, 하얀 속눈썹과 눈썹, 혈관까지 다 보이는 하얀 피부, 파란색 눈을 가진 이노아는 이수키, 이루지와 함께 64만 분의 1의 확률로 태어날까 말까 한 알비노, 즉 백색증 세쌍둥이의 첫째다. 21년 전 쌍둥이 막냇동생 이루지가 실종당한 사건 현장에 있었던 장본인인 그는 마음의 독방 속에 갇힌 사형수를 17년째 자처하는 중이다. 남겨진 유일한 핏줄 이수키 때문에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는 그는 죽음을 잠시 미뤄둔 채 죄책감을 곱씹는다.
이노아의 삶의 목적은 하나. 장기 미제 사건 전담 수사팀으로 발령 나 루지의 실종 사건을 다시 들추는 것. 그리고 마침내 루지의 곁으로 가버리는 것. 그러려면 우선 정우주의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진실에 다가갈수록 루지와 관련된 아픈 과거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리고 그 과거는 어쩐지 정우주 사건과, 렌즈 기술의 비밀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듯 보인다. 정우주를 죽인 범인은 루지의 실종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걸까?
《렌즈》 속 다양한 층위의 매력
초기 렌즈 기술의 비밀을 쥐고 있는 백색증 쌍둥이 동생 이수키, 노아와 함께 렌즈 보안과에 있지만 노아와는 달리 정부의 채람 정책에는 찬성하는 문로한 형사, 처음에는 색안경을 끼고 노아를 바라보지만 점점 마음의 문을 연 원칙주의자 나수호 형사, 노아와 수키의 쌍둥이 막냇동생 이루지의 실종과 관련되어 있는 남도진, 그리고 주변 인물들 또한 소설을 읽는 큰 재미이다. 오로라, 블루아워, 설원, 빙벽 등 북극권을 배경으로 한 이질적인 공간을 세트째 눈앞에 가져온 것 같은 생생한 묘사는 덤이다.
《렌즈》 안 도처에 널려 있는 이런 매력들을 하나씩 주워 들어 들여다보면 어느새 단순한 범인 색출을 넘어, 첨단 기술의 윤리적 문제와 인간의 어두운 욕망, 그리고 가족과의 관계, 정체성 혼란, 진실 추구라는 심오한 주제들을 섬세하게 다룬 작가의 스토리텔링에 흠뻑 젖어들게 될 것이다. 《렌즈》는 단순한 추리소설을 넘어선, 깊이 있는 휴먼 드라마이자, 우리 시대가 마주해야 할 중요한 질문들을 던지는 의미 있는 작품이다. 이담 작가의 개성 넘치는 장편소설 데뷔를 축하한다. 장르 소설의 장인이 되고 싶다는 그녀의 다음 작품 또한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