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다른 길을 감으로써 남과 다른 눈을 얻다
인간 본성에 대한 탁월한 이해자
『나는 왜 쓰는가』는 조지 오웰이 맨 처음 발표한 글인 부랑생활 체험기 「스파이크」부터 마지막 집필 원고인 「간디에 대한 소견」까지 글을 쓴 순서대로 엮었다. 옮긴이 이한중이 “자신의 이력을 통해 패턴과 인습을 거부한 작가”라고 표현했듯이 오웰은 삶의 중요한 국면마다 남들이 예상하지 못하는 길을 감으로써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특별한 눈을 가지게 된다. 그의 글은 책상 앞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라 그의 몸이 직접 세상을 통과함으로써 얻어진 것이었다. 타고난 영민함에 대비되는 밑바닥 삶, 극한의 전쟁 체험 등은 인간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남다른 통찰을 안겨주었다. 이 선집에 묶인 적잖은 에세이들이 자전적 요소를 띠고 있는데, 그렇게 극단적인 상황을 겪어내며 인간에 대한 남다른 깨달음을 얻게 된 사건, 오웰 스스로 삶의 전환적 순간이라 했던 사건들이 곳곳에 담겨 있다. 그는 자신을 혹독하게 차별한 예비학교 교장 부부를 죽도록 미워하면서도 그들의 인정과 총애를 간절히 원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정말, 정말 좋았지」)을 통해 인간의 이중성을 일찌감치 깨닫고, 식민지 경찰간부 생활(「교수형」, 「코끼리를 쏘다」)에서 민족·인종 사이에 놓인 위계와 그걸 공고히 하는 제도의 폐해를 절감했다. 계급을 막론하고 젠체하기와 위선, 허영과 속물근성은 인간이 벗어던질 수 없는 숙명(「영국, 당신의 영국」, 「민족주의 비망록」, 「정치와 영어」 등)임을 알아갔다. 그는 인간의 모순적이고 비이성적인 행태에 좌절하거나 환멸을 느끼는 대신 그것을 인정하고 직시함으로써 작품의 인물 속에 그러한 인간 군상을 표현해냈다. 죽을 때까지 사회주의자로 살았음에도 좌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던 것도 인간과 세상이 결코 평면적이거나 단순하지 않음을 전제했기 때문이다. 오웰이 활동하던 당시 적잖은 좌파들은 “자본주의만 전복하면 사회주의가 도래할 것”이라 생각하거나 “진실이 알려지면 박해는 절로 패퇴하리라는” 혹은 “인간은 본래 선량하며 외부 환경 때문에 부패하는 것일 뿐이라는” 순진한 믿음을 갖고 있었고 오웰은 이를 두고 보지 못했다.
“부자고, 힘세고, 세련되고, 스타일 좋고, 영향력 있는 아이들이 어찌 틀릴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그들의 세계였고, 그들이 만든 규칙은 옳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나 자신이 그런 식의 현실에 ‘자발적’으로는 도저히 순응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 마음속 한가운데에는 언제나 깨어 있는 듯한 내면의 자아가 있어 도덕적 의무와 심리적 ‘실상’의 차이를 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_「정말, 정말 좋았지」 중
가장 암울한 글에도 숨어 있는 아름다움의 순간들
철저한 현실성과 예술적인 서정성의 결합
이번 개정증보판에 추천사를 보낸 시인 진은영은 조지 오웰의 글을 가리켜 “아름다우면서도 철저히 현실적인 글”이라며 “축복 같기도 하고 저주 같기도 한” 그런 재능은 몹시 드물다고 말한다. 이 책의 표제작이기도 한 「나는 왜 쓰는가」를 통해 오웰은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으며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라는 자신의 명확한 입장을 밝힌다. 그러나 문학과 예술의 순수성을 주장하는 입장을 향한 이 똑부러진 일침은, 결코 정치적 신념에 복무하는 문학 작품을 쓰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같은 글에서 그는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고 선언한다. 오웰은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모든 형태에 대한 반대” 입장에 서 있으며, 피압제자의 편에 서는 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사회주의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이 체험한 피억압자의 정서를 글로 표현했다. 한때 파시즘에 맞선 스페인 혁명에 도움이 되고자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가 택한 것은 예술, 즉 글과 문학이었다.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나치의 파시즘과 스탈린식 공산주의, 자본주의)에 반대한 그는 혁명가로서 싸운 것이 아니라, 전체주의의 폐해를 문학으로 표현함으로써 전체주의에 맞섰다. 그리고 75년이 지난 현재까지 전 세계 독자들은 오웰이 그린 ‘문학적’ 세계 안에서, 오웰이 던진 성찰의 ‘현실성’에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그를 꾸준히 불러내고 있다. 리베카 솔닛을 통해 잘 알려졌듯 오웰은 장미와 정원 가꾸기를 사랑했던, 사회의 부정성을 고발하는 것 못지않게 지상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놓지 않는 작가이기도 했다. 이 책에서도 오웰은 「“물속의 달”」을 통해 ‘완벽한’ 흑생맥주를 위한 이상적인 펍을 시시콜콜 상상해보기도 하고, 「두꺼비 단상」에서는 잔잔하면서도 역동적인 계절의 변화를 묘사하며 “자본주의 체제의 사슬에 묶여 우리 모두 신음하고 있는데, 아니면 아무튼 신음하고 있어야 하는데, 찌르레기 지저귀는 소리 때문에, 10월의 잎 노랗게 물든 느릅나무 때문에 더 살 만할 때가 제법 있다고 말한다면, 그게 정치적으로 비난받을 일인가?” 반문하기도 한다. 실제로 이번 개정증보판에서 초역된 「브레이 주임신부를 위한 한마디」는 리베카 솔닛의 저서 『오웰의 장미』의 계기가 되었던 글이기도 하다.
“사적으로 숲 되살리기 사업을 벌임으로써 사회에 대한 개인의 책무를 전부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반사회적 행위 하나를 범할 때마다 일기장에 적어두었다가 적절한 철에 도토리 한 알을 땅에 묻는 것은 나쁜 생각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스무 알 중에서 하나라도 제대로 자란다면, 우리가 생전에 상당한 해악을 끼친다 하더라도 브레이 주임신부처럼 결국엔 공공에 도움이 되는 인물로 남을지도 모른다.” _「브레이 주임신부를 위한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