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라는 일상의 휴식처 속에서,
꽃망울 터지듯 고요히 폭발하는 언어의 온도.”
카페 테이블에 차 한 잔이 놓인다. 순간, 작고 고요한 진동이 일어난다. 곧 차 한 잔의 온기에 마음이 녹으며, 의식이 모든 경계 너머 자유로이 헤엄쳐 다닌다.
문득 떠오른 작은 단어 하나, 어젯밤에 꾼 꿈의 한 조각, 카페에 오면서 본 것들, 스쳐 간 생각들이 노트 지면 위로 저절로 걸어 나온다. 그날의 에피소드가 된다. 이 과정이 거듭되며 리듬을 갖고 쌓여간다. 카페의 사계를 흘러가는 음악이 된다. 마침내 한 권의 책이 된다.
이렇게 태어난 《양들의 친목》은, 카페라는 일상 공간 속 휴식이 창조의 세계로 이어지는 작고 신비로운 문들을 열어 보인다. 화자는 카페 내부에 감도는 부드러운 온기에 감싸이면서, 평소엔 ‘여간해선 쉬 얻지 못하는 고요’ 속으로 미끄러져 든다. 이 상태에서 마치 자동기술처럼, 어느새 글귀들이 노트 위에 안착한다. 의도도 야망도 없는 이 순수한 놀이를 일 년 동안 이어간다. 하루하루가 곧 하나의 리추얼이 된다.
이러한 리추얼, 목적을 겨냥하지 않아서 더욱 아름다운 자연 발생적 세계가 펼쳐진다. 그것은 꿈속의 우주와도 같다. 그리고 이 세계를 담는 배경인 램 카페는, 꿈꾸는 자아를 품어주는 모태이자 존재의 사원이며, 꿈속의 현실 그 자체가 된다.
“꿈속으로는 목적을 끌고 들어온 바 없으니, 여기를 꿈속이라 여기는 것이다.
꿈은 잘 체험됨이 목적이니, 또 다른 목적을 초대할 수 없다.”
저자는 이 꿈과 자신이 나누는 대화를 필사한다. 그 기록 안에는, ‘덧없어서 귀한 것들을 향한 시선’, ‘예민한 자가 세계를 읽는 방식’ 그런가 하면 ‘창조자와 피조물의 역전된 대화’까지도 포함된다. 모든 생명체의 운명이 그러하듯, 자신의 생명력을 무너뜨려 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 놓인 필자는, 이 삶의 정처 없음과 부조리함에 얇은 종잇장처럼 떠는 한편, 그것에 저항하는 생명 본연의 숨결을 자신만의 리듬으로 번역해 낸다. 이는 창조적 인간이 삶의 아이러니에 굴복하지 않고 맞서는 자기만의 방식이다. 그래서 이 기록은 시간의 경계, 감정의 잔물결, 언어의 여백으로 이루어진 작고 투명한 기념비가 된다. 이 산문집에선 하래연 작가의 작품 세계가 지닌, 자연-존재-언어-감정의 축이 유독 뚜렷하고 정제된 목소리로 등장한다. 매우 고요하지만 폭발하는 문장들이다. 자기 존재의 파문을 음악처럼 번역한 글이다. 부디 이 언어의 조각들이, 당신의 세계를 말갛게 지켜주기를!
이 글들은, 모든 필멸의 존재에 내재된 슬픔의 사용 설명서이며, 그 슬픔으로 뭉친 구름이 노래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악보와도 같다. 무엇보다도 시적이고 음악적이면서도 정확한 감각적 언어를 자유로이 부리며, 저자는 허무와 대결하는 조용한 전사가 된다.
“오늘이라는 날들이란, 제목이 없다기보다는 제목을 기다리는 날들이다.”
《양들의 친목》 속에서, 우리 일상에 흔한 휴식처인 카페는, 이 언어의 마법과 공모하면서 몽환적인 장소로 탈바꿈한다. 일상이 이상(理想)이 되는 마법의 글쓰기를 통해, 저자는 자신이 이런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삶의 파편들을 회고하고 되새기며 끌어안아, 영롱한 모자이크로 바꾸어 놓는다. 그러면서 자신이 마주하는 모든 ‘오늘들’에 매번 새로운 이름을 지어준다.
“카페 창문 너머의 침묵과 소리들은 검고 흰 건반으로 번역된 후, 다시 하나의 짧지만 뚜렷하고 부드러운 멜로디로 빚어져 흘렀다.”
“여기에 각자가 몰고 오는 근심과 불안, 안도와 희망들은 제각기 다른 그림으로 그려져 이 갤러리의 액자 속에 담겼다.”
이렇게 이 작품 속에서 램 카페는 음악이 되고, 갤러리가 되고, 고요의 도서관이 되고, 동시에 기억의 창고가 된다. 이 가상 현실 같은 장소는 한 권의 책으로 모습을 바꾸어 독자들을 그 테이블로 초대한다. 따로인 듯 또 같이 존재하는 램 카페에서, 외로운 우리 모든 이들의 고요의 연대, ‘양들의 친목’이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