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공 출신 소설가의 자전적 성장 소설
소설가 이종하는 13살 때부터 경기도 성남에서 소년공으로 살아온 특이한 이력을 가진 작가다. 그 시절을 소설로 쓰지 않고는 자신의 문학의 발걸음을 앞으로 내디딜 수 없다는 듯, 작가는 자신이 소년공이 될 수밖에 없었던 가족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부모님과 떨어져 살아야 했던 불우한 환경, 거기다 아버지가 창졸간에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외가에서 산 유년 시절은 실존적인 성장의 바탕이 되었다. 다행히 외가 식구들이라는 울타리와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사랑은 소년 이종하의 문학적 기반으로 작용한다.
이 작가의 자전 성장 소설은, 문학적인 자기 고백이면서 1970년대에 고향을 떠나 도시로 나와 살아야 했던 청춘들의 초상화다. 공장 노동을 감당하기 힘들었던 어린 소년이 경기도 성남이라는 도시에서 꿈을 버리지 않고 살아온 시간은 문학적 감동 이전에 삶에 대한 숙연한 감정을 갖게 한다. 작가 자신도 그 시절을 돌아보며 “학교 교실에서는 배우지 못할 가치관과 세계관을 몸으로 습득”(‘작가의 말’)했다고 했거니와 그것의 비밀은 역시 주어진 현실에 무릎 꿇지 않겠다는 “절실함”이다. 하지만 13살 소년이 처음에 해야 했던 공장 노동은 고통과 공포였을 것이다.
일하던 사람은 5명 정도 되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화롯불에 송진 덩어리 같은 것을 녹여 유리 렌즈를 기계에 끼워 갈 수 있도록 무언가를 붙여주는 일을 하는 게 처음에 들어간 내가 하는 일이었다.
솔직히 그날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송진 냄새가 너무 지독해서 숨쉬기조차 어려웠고, 화롯불 앞에서 송진 덩어리를 녹여 무언가를 붙이는 일은 아랫도리가 너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너무 아파서 못하겠어요.”(55쪽)
인용은 주인공이 처음 일하게 된 안경 렌즈 공장에서 채 이틀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는 내용이다. 1970년대의 노동 조건이라는 것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지금의 노동 현장이 산업의 대형화로 위험해졌다면 1970년대의 경공업은 공장 내 환경이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거기에 초등학교를 막 나온 13살 소년이 적응하는 것은 무리이다 못해, 비인간적이다. 주인공은 안경 렌즈 공장을 잠깐 거쳐 가방 공장을 전전하며 10대를 보내지만, 언제나 학업에 대한 열의에 차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생존이 우선시되는 소년공의 상황은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노동을 그만둘 수도 없는 일이다. 도리어 먹고 잘 곳도 변변치 않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던 권투 도장에 다시 찾아가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끝까지 공부를 놓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타고난 ‘공부머리’ 때문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초등학교 때 은사였던 최병준 선생님 때문일 것이다. 부모와 떨어져 살아야 했던 소년의 설움을 꿈으로 전환시킨 이가 최병준 선생님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다음과 말은 그것을 가리켜 준다. “서울에서 전근 오신 최병준 선생님이 5학년 2반이었던 우리 반 담임이 된 인연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선생님에게 실망감을 드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더 중요한 이유였다.”(34~35)
소설은 끝나도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소설 속 주인공이자 작가 자신이기도 한 ‘종원’은 성남의 가방 공장을 전전하면서 매우 뛰어난 가방 기술자가 된다. 어떻게 보면 한 입지전적 인물의 자기 서사 같기도 하지만, 작가가 강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학교 공부는 못 했지만 버릴 수 없는 꿈에 대한 절실함이다. 이 절실함이 주인공을 소설가로 만들어주기도 했고 대학교를 졸업하게도 했다. 그렇다고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도리어 대학교에 합격하고도 등록을 못 하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역설적으로 이것은 가방 제작에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게도 해준다. 주인공이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을 찾은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역경과 역경을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로 다져진 주인공은 드디어 먹고사는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때 만난 운명같은 존재가 라오스의 소녀, 누니다.
이 소설은 라오스에서 주인공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구조로 짜여졌다. 라오스의 현재와 역사를 중간중간에 가져오는 것은 뜻밖에도 라오스라는 거울을 통해서 경제 발전을 이룬, 혹은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난 자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부자가 된’ 대한민국 중년 남자가 라오스와 라오스의 소녀 누니에 대한 동정심이었나?
버뺀냥, 그 한마디에 나는 많은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 싸우지 말자, 우리 따지지 말자, 우리 서로를 존중하자, 살아가다 보면 다 괜찮아지지 않느냐, 등등. 수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버뺀냥이었다.
내가 경험한 라오스 사람들은 말 그대로 순박했다. 그 순박함이 평화로움을 만들고 있는 듯했다. 서로를 존중하고 경쟁하지 않는 사람들. 라오스에서 사는 서민들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들과 섞이고 싶었다. 그들에게 존중받는 듯한 라오스에서의 경험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한국에서 63년을 치열하게 살면서도 존중받지 못했다면 라오스에서는 일상이었다.(151)
일단 「프롤로그」부터 가볍게 주인공 자신의 처지를 고백하지만, 정작 현재 서 있는 곳은 라오스다. 그리고 첫 문장이 라오스어 ‘버뺀냥’의 뜻인 “괜찮아”로 시작하는 것은 라오스가 주인공 자신의 삶, 그 삶을 살게 했던 대한민국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자전적 성장 소설이다 보니 소설의 주 내용은 라오스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겪어온 풍파와 그 풍파의 디테일이다. 라오스 소녀 누니와의 만남이 신파적으로 빠지지 않은 이유도 한편으로는 주인공이 살아내야 했던 1970년대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1970년대의 가난이 가졌던 순박함을 경제가 발전하면서 잃은 것 같다는 고독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혼자’ 라오스 여행을 하는 것이고 여행도 여기저기 관광을 하는 게 아니라 한곳에서 라오스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로 소일하는 이유이다.
이 독특한 자전적 성장 소설은, 주인공의 1970년대, 즉 가난과 불합리의 시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 암시하면서 마무리 된다. “그날의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내가 살아온 삶은 늘 낯선 곳을 향해 걸었다.”(323) 그러면서 동시에 주인공의 현재는 라오스에서 돌아온 “먼지 자욱한 한국 하늘”(327) 아래다. 소설은 끝났지만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의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