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인생론〉은 그가 58세 때인 1886년 가을부터 1887년 여름에 걸쳐 쓴 노작이다. ≪전쟁과 평화(1863~1869)≫와 ≪안나 카레니나(1873~1877)≫를 쓰고 ≪부활(1899)≫을 쓰기 전의 톨스토이의 ‘위기’라고 불리던 때 쓴 작품이다. 그는 〈참회록〉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5년 전부터 나는 때때로 무언가 매우 기묘한 일을 체험하기 시작했다. 의혹과 생활이 정지되어 버리는 것 같은 순간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등을 전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순간이 갑자기 나를 덮친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회의에 사로잡힌 채 갈팡질팡했다. 나는 곧 그곳에서 빠져나와 이전의 생활로 돌아갔지만, 그 후 이러한 의혹은 더욱 빈번하게 떠올랐을 뿐만 아니라 항상 나의 내부에 남아 있었다. 생활의 정지는 항상 무엇을 위해? 그리고 그다음에는? 이라는 같은 의문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러한 의혹은 마치 먹물처럼 뚝뚝 떨어져 내 가슴 속을 검게 물들였다.’ (〈참회록〉 제3장)
‘나의 생활은 정지했다. 나는 숨을 쉬고 먹고 마시고 잠을 자지만 그곳에는 참된 생활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를 충족시키는 합리적인 욕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참회록〉 제4장)
인생에 대한 이러한 철저한 회의는 곧 톨스토이즘 혹은 톨스토이주의라고 불리는 확고한 신념으로 바뀌어 그 신념의 일단이 〈인생론〉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 〈인생론〉을 집필했던 1886년 8월 초순 톨스토이는 어떤 가난한 과부를 위해 건초를 운반해 준 일이 있었다. 그때 그는 마차에 다리를 다쳤는데 그 상처가 악화하여 의외로 심각해져 40도의 고열과 구토, 심한 고통을 일으켰다. 이 병은 어쩌면 톨스토이의 생명을 거의 앗아갈 정도로 몹시 위중했다. 그 무렵 어떤 출판사의 기자였던 안나 콘스탄티노프나 지테리프스(후에 그의 친구인 체르토코프의 부인이 됨)라는 여성이 이것을 알고 톨스토이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내왔다. 그것은 단순한 위로의 편지가 아니라 그녀 자신의 인생관, 생사관을 쓴 긴 편지였다. 톨스토이는 이에 대한 회신을 위해 편지를 썼다. 이 편지가 가필에 가필이 반복된 후 독립된 논문이 되어 불후의 명작인 〈인생론〉이 되었다.
이 저작은 톨스토이의 많은 작품 중 명저로 유명하지만 난해하기로도 이름난 작품이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에서 인생이란 행복하게 되려는 욕구이며 그러한 노력 속에 인생의 의의가 있고, 동물적 개인의 행복은 실현 불가능하다. 참된 행복, 참된 생명은 동물적 자아를 이성적 의식에 종속시키는 활동으로 얻을 수 있고 인간의 참된 생명은 죽음에 의해 소멸하지 않으며 고통은 인간을 참된 생활로 인도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그러므로 행복이야말로 인생의 목적이며 인간은 모두 이 목적을 향해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인생의 이 목적을 어떻게 하면 달성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해 그는 사랑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대답한다. 그는 사랑은 이성의 활동이며 인간은 이 이성, 즉 신의 활동인 사랑에 의해 선한 목적을 향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것이 인생이라고 말한다.
1888년 말 〈인생론〉이 발간되자 러시아 검열위원회는 ‘이 책은 신의 말이 없고 인간의 이성만을 강조하여 교회와 교의에 불신을 일으키므로 무조건 판매 금지’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종무원(宗務院, 제정 러시아 정교회 최고 기관)은 〈인생론〉의 발행을 금지하고 인쇄소에 있던 책 600부를 모두 몰수했다.
〈참회록〉이 발표된 것이 1882년이었고 〈인생론〉이 발표된 것이 1887년이었다. 톨스토이 자신은 〈참회록〉을 끝내면서 이것의 제2부를 쓸 예정임을 밝혔다. 그런데 그가 말한 제2부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인생론〉인 것이다. 그러나 작품 내용의 성격상, 그리고 독자의 이해를 쉽게 하려고 본서에서는 〈인생론〉을 앞에 실었고 〈참회록〉을 뒤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