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애호가의 궁극을 보여주다
이 책의 지은이는 역사가가 아니다. 정형외과 의사이니 말 그대로 아마추어 역사 애호가일 따름이다. 한데 바위글씨에 꽂혀 온갖 곳을 쏘다닌 것을 바탕으로 《실록》을 비롯한 사료는 물론 개인문집, 신문기사를 뒤져내 이야기를 캐내는 열성과 성취는 애호가 수준을 벗어난다. 이번 첫 책에서는 빠졌지만 그의 답사는 일본까지 걸친다. 여기에 맹견에 쫓기고, 뱀에 놀라고, 잔꾀를 부려 금지된 지역을 가는 등 실감나는 이야기가 버무려져 이 책은 깊이와 재미를 겸비한 수작(秀作)이라기에 손색이 없다.
어쩐지 나만 알 것 같은 이야기
서울 동작동의 국립현충원의 원주인은 중종의 부인인 창빈 안씨였다. 아들 덕흥군이 그녀의 유택을 이곳으로 옮겼는데 덕흥군의 아들 하성군이 왕위(선조)에 오르면서 조선 최고의 명당자리가 되었다. 국립서울현충원이 창빈 묘역에 자리 잡은 한 이유이다. 서울대 또한 ‘주인’은 추사 김정희와 어깨를 나란히 한 자하 신위다. 그의 5대조가 자하동(현 서울대 자리)에 자리를 잡았고, 현 서울대박물관 뒤에는 신위의 고조부 신확의 묘에서 가져온 문인석 한 쌍이 있다. 오늘날 강남의 요지 잠실이 원래 강북이었음을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잠실은 잠실도라는 섬이었는데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전에는 가물면 걸어서 넘어갈 수 있었단다. 1914년 행정구역 명도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 잠실리였다.
상식을 뒤엎는 기막힌 이야기
중종반정의 ‘브레인’ 성희안의 묘를 찾은 지은이는 그를 ‘타락한 혁명’의 표본으로 든다. 그를 두고 원대한 꾀에 어둡고 집과 시첩에 사치를 부리는 등 방종하다가 생명을 잃었다고 평한 《실록》에 근거해서다. 선조의 맏아들 임해군은 병사를 모으려 함경도로 가서는 온갖 패악질을 일삼아 오죽했으면 주민들이 감금해 왜장에게 넘겨버렸을까. 위정척사의 대명사 최익현이 새긴 ‘평양화표’에서 “세상은 위대한 명나라의 것…요 임금을 섬기고 공자를 배워서…”란 구절을 보면 절로 한숨을 나오지 않을까. 나라가 흔들리는데 기껏 사대주의라니.
잊고 지내기엔 안타까운 이야기
광해군의 아들 폐세자 이지는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자 가위와 인두로 땅굴을 파서 탈출했다가 사흘 만에 붙잡히고 이 소식을 들은 이지의 처는 자진했다. 폭군의 아들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수락산 ‘옥류동’에서 되짚어본 사연이다. 조선 2대왕 정종의 둘째 아들 순평군은 40세가 넘도록 한 글자도 모르는 무식꾼이었다. 그의 유언은 “종학(宗學?왕족들을 위한 교육기관)을 영원히 떠나는 것이 크게 기쁘다”였단다. 학습지진아의 한이랄까. 일제강점기의 대지주 조병학은 폐교 위기의 세브란스를 살리기 위해 전 재산을 기부했는데 《친일인명사전》에 실렸다. 일제에 국방헌금을 냈다는 이유인데 ‘친일파 독지가’는 어떻게 봐야 할까.
돌에 새겨 전해지는 장한 이야기
충북 진천군의 ‘옥천병’이란 바위글씨는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최석정이 남긴 것이다. 천재 수학자 오일러에 60여 년 앞서 9차 직교 라틴방진을 구한 빼어난 수학자의 흔적이다. 병자호란 때 척화론을 펼쳐 충절과 절개의 화신으로 꼽힌 김상헌은 전후에 일신의 안녕만 영위했다. 이를 두고 “…국가의 명운이 경각에 달려 있을 때 산성을 빠져나가 멀리 달아나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당시의 일이 대충 안정 되었는데도 끝내 성상을 찾아와 뵙지 않았습니다…”라 통박하는 상소를 올린 유석의 신도비가 경기도 안산시에 아슬아슬하니 서 있다. 조선의 최연소(만14세) 과거급제자 이건창의 영세불망비가 강화도에 있다. 비록 정치적 배려에 힘입어 급제했지만 청렴하고 유능해 조선 후기 암행어사의 대명사로 불린 그의 공덕을 기리는 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