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사라진 근대건축’ 안내서
이 책은 ‘건축’이 아닌 ‘사라진’에 초점을 두고 쓰였다. 앞선 건축계와 역사 연구 자료들을 살펴보고 많은 부분을 참고하였으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건축물에 관한 정보를 아카이브해 그것들이 도시에서 사라져 간 이야기 자체를 모아 엮고자 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시대, 그래서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 사라져 줬으면 하고 바라는 것들. 마치 가위로 싹둑 오려 내거나, 그 위에 다른 겹으로 덧대어 숨기듯 우리 손으로 지워 버린 그 건축물들을 이 책에 모았다. 건축물들이 사라지기 전, 서울에 살던 구성원에게 어떻게 경험되었는지 그 일상적이고 평범한 이야기들을 모아서 재구성했다.
『사라진 근대건축』 개정판은 함께 걷는 길을 안내한다. 1) 서울 중심가 길은 구 서울역사를 출발해 옛 미츠코시백화점을 지나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경성전기주식회사 등을 따라 걸으며 그 장소와 건물에 겹겹이 쌓인 이야기를 떠올려 볼 만하다. 2) 남산 길은 국치길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신궁이 자리했고 군사정권기에는 비밀리에 운용된 장소들의 흔적을 차분한 마음으로 따라가는 경로다.
『사라진 근대건축』은 250여 점의 귀중한 사진과 문서 자료(대한민국 국가기록원부터 미국 국립문서기록청까지)를 보기 편하게 체계적으로 수록했다. 역사, 건축, 디자인을 아우르는 참신함과 깊이를 인정받은 ‘출판 콘텐츠 창작지원사업’ 선정작이다. 사라져 가는 이 도시의 공간과 장소들을 탐색하는 시간 여행자를 위한 안내서 『사라진 근대건축』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익숙한 일상의 풍경 혹은 유령처럼 숨어 있는 유산을 찾아서
‘옛 조선총독부 철거냐 보존이냐?’(1991년 MBC 「여론광장」) 논쟁 끝에 1995년 광복 50주년을 기념해 철거 행사와 함께 일제 잔재인 조선총독부 청사가 사라졌다. 그런데 이를 계기로 수년간 공론화된 찬반논쟁을 통해 우리 사회는 일제강점기 건축물 같은 부정적 문화유산(negative heritage)도 철거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인식을 얻었다. 그렇게 2001년 ‘등록문화재’ 제도가 생겨 근대 건축물도 보존의 가치가 있다면 문화재로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의 1장 ‘지워진 건축, 일제 식민시대’는 조선총독부 청사가 광화문을 밀어내고 들어섰다가 어떻게 우리 근현대사와 함께하다 사라졌는지, 주요 모습들을 시간순으로 따라가 본다. 또한 남산에 있었던 조선신궁을 비롯해 전국에 무려 1,400여 개나 들어섰던 신사들의 과거와 현재를 알아보았다. 지금의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에 일본인이 세워 운영했던 반도호텔의 영락 또한 극적이다.
한국전쟁 중 서울은 남북 간의 치열한 전투와 공습을 겪으며 회복되기 힘든 큰 피해를 입었다. 서울에 생긴 근대건축의 공백은 전쟁의 영향이기도 하다. 2장 ‘파괴된 건축, 한국전쟁과 서울 요새화 계획’은 전쟁 중 도심의 파괴, 그리고 전후 서울 요새화 계획으로 급히 건설된 남산터널과 을지로 지하보도, 남산타워, 북악스카이웨이, 잠수교 등을 돌아본다. 이 건축물들은 70년 전 전쟁의 후유증이기도 하다. 방공호(남산터널, 을지로 지하보도)나 전파교란(남산타워) 등의 군사적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이 시설들을 이용하는 시민이 얼마나 있을까. 정전 중이라는 상황은 여전하지만 이들은 어느새 익숙한 일상의 풍경 혹은 유령처럼 이 도시에 있다.
3장은 ‘숨겨진 건축’, 즉 군사정권기 ‘발전국가’를 지향하며 건설된 세운상가를 비롯한 도시 개발, 그리고 폭력으로 얼룩진 국가기관인 중앙정보부를 재조명한다. 남산에 있던 중앙정보부 건물들은 이미 많이 사라졌다.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안기부는 관련 건물 41개 동을 서울시에 이관하며 건물들 모두를 철거해 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철거를 요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 시대의 어두운 면을 감춘 건물은 사라져 망각되어도 되는 걸까?
저자는 사라진 근현대건축물을 리서치한 결과를 지도 위에 새겨, 함께 찾아보고 생각해 볼 것을 권한다. 이 책이 어두운 역사를 찾을 때 쓸 만한 지도가 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