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치 황금기의 미술시장: 사유재산으로서의 유화
15세기 유럽의 극상류 계층에 의해 공유되었던 아마씨유를 안료에 섞어 그리던 회화는 16~17세기 더치 공화국에서 이동과 보관이 쉬운 유화로 진화했다. 전통적인 성상화가 성당의 벽과 천장의 부착된 ‘공공미술’ 프로젝트라면 캔버스 위에 그려진 유화는 사고팔 수 있는 사유재산에 해당했다. 이처럼 미술시장의 탄생에 있어 유화는 필수조건이었다.
동서양을 통틀어서 가장 민주적인 사례로 손꼽히는 더치 공화국의 미술시장은 어떻게 등장했는지, 해상의 시대를 점령하던 네덜란드는 어떻게 현대적인 의미에서 미술시장이 형성되고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되었는지를 살펴본다.
화상의 네트워크와 전위예술 시장: 폴 뒤랑-뤼엘의 화랑가
19세기 후반 파리의 중산층은 ‘현대’ 혹은 ‘동시대’ 미술에 경도되었다. 나폴레옹 3세의 공화정 하에 오스만의 도시계획에 따라 개조된 그랑 블루바드로 보석상, 금융인, 그리고 유명인이 몰려들었다. 뒤랑-뤼엘을 비롯해서 인상파와 후기인상파를 다루는 전문적인 화랑이 미술학교 근처가 아닌 라핏가와 문화예술의 중심지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들은 1870~1871년 보불전쟁 이후 파리뿐 아니라 런던, 베를린, 미국의 새로운
컬렉터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파리와 유럽뿐 아니라 세계 미술시장의 중심거리인 라핏가의 화상 네트워크는 이처럼 탄생했다. 라핏가의 화상은 20세기 초까지 런던과 뉴욕 미술시장에 지점을 내는 등 세계 미술시장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미국 미술관과 슈퍼 컬렉터의 등장
20세기 초 유럽의 곡물 시장이 쇠퇴하고 유럽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면서 영국의 대표적인 화상 조셉 두빈이 주장한 바와 같이 미국은 미술시장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올랐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영국의 경매시장이 고미술이나 영국 풍경화, 프랑스의 바르비종파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에 반해 1930년대 미국의 주요 컬렉터 등은 투자와 미술관 건립을 통한 교육의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시작했다.
현대미술 시장의 사회적인 구조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미국 컬렉터들과 미술관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1950~1960년대 미국의 현대미술 시장이 새로운 황금기를 맞이하면서 어떻게 뉴욕현대미술관의 공격적인 컬렉터와의 위험한 동반자 관계를 시작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사치 효과: 매개자에서 컬렉터의 시대로
21세기 들어 경매시장과 아트페어는 전에 없는 성장을 거듭했다. 1970년에 설립된 국제적인 광고대행사 사치 앤드 사치의 대표인 형 찰스는 1982년에 영국의 문화예술위원회에서 만든 새로운 작가 후원회에 위원이 되면서 미술계의 후원, 창작, 유통의 모든 분야에 깊숙이 관련되었다. 199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전 세계 미술시장과 심지어 창작과 정책의 영역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치의 발자취를 되짚어본다. 이를 통해 21세기 투자 중심의 미술시장과 미술계의 지평이 어떻게 매개자의 존재를 약화시키고 컬렉터가 중요 주체가 되는 시장을 만들었는지를 살펴본다.
21세기 컬렉터 입문
미술시장의 컬렉터가 갖게 되는 기초적인 질문을 다룬 장이다. 아울러 올바른 미술 투자를 위한 세 가지 측면을 강조했다. 첫째, ‘정보의 질’이다. 어떻게 작가와 작품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얻을 수 있는가? 작품가의 적정성을 따지고 위작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선 올바른 정보를 얻는 일이다. 둘째는 과연 작품이 ‘오랫동안 소장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의 측면이다. 소장한 작품의 성장 가능성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작품과 컬렉터의 궁합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유연성’이다. 소장품을 되팔아서 이윤을 남기고 싶다면 과연 이 작품을 어떻게 팔 수 있을지도 고민해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