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 길 위의 말 세 마리와 기상천외한 문제 해결법
시칠리아 이야기는 재미있다. 카타니아, 노토, 시라쿠사, 모디카, 라구사, 아그리젠토, 팔레르모, 체팔루, 타오르미나, 카스텔몰라, 팔라초 아드리아노... 이탈리아와 인연이 없는 사람이 보기엔 요리의 이름 같기도 한 도시 이름들이 시칠리아 편의 끝에 이르면 어느새 익숙하고 정다운 울림으로 기억된다. 일반적인 여행서에서 보듯 어떤 한 도시와 그 도시의 핫플레이스, 먹거리, 감상을 나열한 수준이 아니라, 그 도시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장소와 역사, 문화, 예술, 풍속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의 시선에서 다큐멘터리인 줄 알고 봤는데 느닷없이 주인공이 등장하는 재미있는 드라마 같은 여행 에피소드들을 직조해낸다.
시칠리아 여행의 전반에 흐르는 정서는 유쾌함, 홀가분함, 느긋함과 함께 군데군데 등장하는 〈시네마 천국〉의 아련함이다. 여행을 많이 한 여행 전문가답게 길 위에서 희박한 확률로 만날 수 있는 운명적인 풍경이나 터무니없는 해프닝과 조우하기도 한다. 한적한 길에서 마주친 말 세 마리의 기적적인 장면이나 3열로 주차된 차를 빼내는 시칠리아만의 특별한 방법 등, 구석구석 김미라만의 시선의 느껴진다.
노르망디 - 정원사 모네와 안개 속에서 떠오르는 몽생미셸
문화와 예술의 나라 프랑스! 모네, 고흐, 로댕, 에릭 사티, 모파상, 르블랑, 사강, 헤밍웨이... 노르망디 편은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위대한 예술가, 작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간 여행이다. 모네는 노르망디의 여러 도시와 인연이 있었던 예술가다. 그는 노르망디 곳곳에서 어떨 땐 캔버스를 이웃 아이들에게 들게 하고 편히 웃음 지으며 그 뒤를 따라가는 아저씨로, 어떨 땐 정원사로, 어떨 땐 집요하게 수련을 그린 화가로 등장한다.
작가가 영화 〈라스트 콘서트〉 때문에 알게 된 몽생미셸. 몽생미셸 안에 있었으면 결코 볼 수 없었을 ‘안개 속에서 홀연히 떠오르는’ 풍경을, 그 건너편 마을에 숙소를 잡았기 때문에 보게 된다. 특히 이런 순간은 작가의 사유와 성찰이 빛난다. 다른 사람이라면 별생각 없이 멋있다, 신기하다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작가에게 이 순간은 ‘‘건너편’이란 닿고 싶은 간절함과 닿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혼재된 자리. 건너편에 앉아 물끄러미 풍경을 바라보고, 인생을 바라보는 순간은 여행이 건네주는 축복’이다.
펠로폰네소스 - 여행자의 특권, 은총 같았던 구름 다발
작가는 펠로폰네소스 여행을 ‘어른의 여행’이라고 말한다. 모넴바시아에서 시작하는 펠로폰네소스 여정은 ‘매혹’ 그 자체다. 마을의 끝에서 끝까지의 길이가 350미터에 불과하다는 모넴바시아는 여전히 중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신기한 곳이다. 특히 작가가 이야기한 ‘한 번의 여행은 한 번의 망치질’이란 표현에서 여행은 도락가들의 취미활동 따위가 아니라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는 힘이 있는 적극적인 문제해결 활동이라는 깨달음을 준다. 작가는 여행의 매력으로 ‘여행자의 오해’를 꼽는다. 그는 여행의 추억과 낭만 중 상당 부분이 여행자의 오해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가령 각각 다른 결혼식에서 신부가 화사하게 웃고, 안 웃고를 보고 이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을 하는 것처럼. 설령 여행자가 진실과는 다른 해석을 하더라도 바로 그것이 여행의 매력이며 여행자의 특권이라고 주장한다. 펠로폰네소스 편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길 위의 운명적인 순간이다. 저자는 카르다밀리에서 바티아로 가는 길을 달리다 마치 산 위에 구름 다발은 얹어놓은 듯한 ‘신이 보내준 선물’ 같은 신기한 풍경을 마주한다. 쌍무지개를 보면 나이를 잊고 좋아하는 것처럼, 잔잔한 여행담의 군데군데 이런 신기한 풍경에 대한 묘사는 ‘세렌디피티’ 그 자체다.
펠로폰네소스 편에서 작가는 가장 허심탄회하게 본인을 드러낸다. 소설로 치면 ‘위기’, ‘절정’의 단계쯤? ‘도입’, ‘발단’에 해당하는 것이 시칠리아, ‘전개’에 해당하는 것이 노르망디. 각 단계마다 작가가 느끼는 성찰의 순간들을 만날 수 있다.
음악, 영화, 명화, 풍경...
방송 작가만이 풀어놓을 수 있는 다채로운 지식향연
매일의 글쓰기로 수십 년 동안 청취자들의 마음을 채워주고 있는 김미라 작가는 사소한 다름을 섬세한 눈길로 포착하여 다양한 각도로 풀어낸다. 이 능력이야말로 오랜 시간 김 작가가 사랑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 작가는 글감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한다. 소설, 에세이, 전문서적, 기관지 등의 책을 두루 섭렵하고 공연을 보고 여행을 해서 경험을 쌓는다. 이미 오래전부터 인정받고 많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작가이지만 이런 노력 덕분에 해를 거듭할수록 더 감동적인 글이 나올 수 있었고, 그 노력의 정수가 《열두 번의 체크인》으로 탄생했다.
한 축은 작가 자신의 여행 이야기가 펼쳐지는 가운데 다른 한 축으로 여행지의 역사, 문화, 예술가, 소설가, 영화, 음악 등의 이야기가 마법 주머니처럼 이어진다. 가장 솔깃한 포인트를 짚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설명하기 때문에 읽으면서도 어렵다거나 공부할 때처럼 머리 아프지 않고 편하게 호흡하듯 다른 나라 문화를 배울 수 있다. 책을 덮으면 에릭 사티가 누구인지, 그의 음악은 어떠했는지, 오랑주리 박물관에 전시된 모네의 수련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싶게끔 만든다. 이 책은 독자의 세계를 자연스럽게 넓히는, 독자 스스로 채울 수 있는 공간을 비워놓은 여행서다.
여행력 만렙 방송 작가의 오감 충족 여행기
“시칠리아 여행은 느닷없이 결정되었다.”로 시작되는 작가의 여행에서, 작가는 친구1, 친구2와 함께 소형 렌트카를 빌리고 프로제코를 마시고 두오모 광장을 활보한다. 마치 우리도 그들과 함께 그 장소에 있는 것처럼 그곳의 공기를 들이마시고 버스커의 연주를 듣는다. 산타루치아 알라 바디아 성당에서는 배덕한 천재 화가 카라바조의 그림 〈성녀 루치아의 매장〉을 감상하면서 전율한다. 체팔루 숙소에서는 귀족 방 침대의 편안한 감촉에 몸을 맡긴다. 오감을 충족시키는 여행기란 이런 것일까? 읽는 내내 초콜릿의 단맛과 쓴맛, 올리오 피칸테의 매운맛, 레몬 그라니타의 신맛, 바다의 짠맛이 아른거린다.
저자는 한 인터뷰에서 “라디오 작가는 사람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글을 쓰기 힘들다”고 했다. 남들 다 가는 해외여행, 쏟아지는 여행서 홍수 속에서도 이토록 뭉클한 여운을 남기는 여행기가 그래서 가능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