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에 밝게 빛나는 별은 예부터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별을 보고 날씨나 재난 혹은 개인의 길흉화복을 점쳤고, 거친 바다나 낯선 곳에서 길을 찾기 위해 별을 찾았다. 아주 일찍부터 별은 ‘찾는 것’이었고, 사람들은 하늘에 점처럼 뿌려진 별들 사이에서 의미가 부여된 별을 찾아 그것들을 좇았다. 밤의 어둠에서, 망망한 대해에서 길을 알려 주는 것은 별들이었다.
그러나 어떤 별은 오히려 우리를 찾아왔다. 고대 로마 제국이 팔레스타인 땅을 다스리던 어느 날, 밝게 빛나는 별은 이제 막 세상에 강생한 아기 예수 앞으로 동방의 박사들을 안내했다. 수백 년이 지난 후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별빛이 스페인 북서부 갈라시아 지방의 한 동굴을 비추었고, 그 동굴에서 예수의 제자이자 사도 중 첫 번째 순교자인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됐다. 길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지 않아도 그들을 부르던 별들이 있었고, 그 별이 비추던 곳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모여들고 있다.
준비된 순례란 없다
심장이 타오르는 곳으로 떠날 뿐
산티아고 순롓길은 오늘날에도 수많은 이들을 길 위로 이끈다. 지금도 한 해 20여만 명의 순례자들이 각자 마음의 지향을 찾아 길 위로 나서고, 수백 년 전 별빛이 비췄던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 먼 길을 걸으며, 그 걸음의 여정에서, 그리고 그 끝에서 그들이 얻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예수회 수도자이자 철학을 연구하고 대학 강단에서 가르치는 교수로 오랜 세월을 보낸 저자 김용해 신부의 글에서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18년 안식년을 맞이해 떠난 순롓길에서 저자는 “사제나 교수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배낭 하나 메고 홀로 걷고 싶었다.”라며 산티아고 순롓길을 걷고자 했던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나는 한 인간으로, 그보다도 자연 안의 한 존재로, 또 다른 타자, 즉 자연과 소위 정신적 존재라 불리는 또 다른 인간과도 소통하고 싶었다. 머리보다는 몸으로 체험하는 순례, 지식보다는 경이감을 체험하고, 나(주체)보다는 자연과 타자에 집중하는 순례를 하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이 순례를 통해서 결국 내가 누구인지를 더 깊이 알고 싶었다.” - 글을 시작하며
주체적 자아를 내려놓는
29일, 800킬로미터의 순롓길
이 책의 제목 ‘비아토르’는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를 축약한 것이다. ‘Homo’는 인간, ‘Viator’는 여행자를 뜻한다. 따라서 ‘비아토르’는 ‘길 위의 인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제목은 참자신이 되기 위해 길을 걷는 인간의 자각을 드러낸다.
저자는 생장 피에 드 포르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프랑스 길’이라 불리는 산티아고 순롓길,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도시 상구에사, 순롓길 이후의 묵시아까지 29일간 800여 킬로미터를 걸으며 길 위에서 자신과 대면한다.
저자는 그 길 위에서 만난 자연과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감정들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참자아를 찾기 위한 과정이 일생의 순례임을 깨닫는다. 산티아고 순롓길은 바로 그 인생의 축약이었다. 그는 그 안에서 체험한 모든 경험을 통해 마음을 울리는 것들을 기록하고 남겼다. 이 책은 그 기록의 산물이며, 길 위의 고통과 슬픔으로 정화된 영혼의 기록이다.
“매일 새로운 사건을 통해 내 마음 깊은 곳에 울리는 소리를 적었다. 점점 많은 걸음이 축적되고 의식이 침잠하자 잠을 자다가 꿈에서 그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럴 때면 잠을 자다가도 머리맡의 노트에 메모해 두고 걸음을 옮기며 되새김하곤 했다. 이 순례가 나와 하느님을 더 잘 깨닫는 계기가 되었음이 확실하다.” - 글을 시작하며
영혼을 정화하는
길 위에서 마주친 슬픔과 고통
하루 20-30킬로미터의 길을 걸으며 보낸 29일은 기도와 묵상을 하고,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불쑥불쑥 찾아오는 추억과 근원을 알 수 없는 슬픔에 대해 숙고하는 시간이었다. 개인적 차원의 슬픔의 근원을 돌이켜 보고, 공동체라는 집단의 기억 안에 내재된 슬픔의 근원을 추적해 본다.
이렇게 길을 걸으며 숙고하는 시간은 저자의 감정과 영혼을 정화하는 시간이 되어 주었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고자 했던 걸음은, 저자에게 그가 속한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소명 의식을 불러일으키고, 길 위의 인연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했으며, 자신을 둘러싼 자연과 환경에 더 큰 감동을 느낄 수 있게 이끌어 줬다.
“정의의 이상은 자기 검열에 움츠리지 않고 자신과 사회를 향해 더욱 지향하는 태도로 실현되어야 하지 않을까. 슬픈 감정이 가시자 들꽃들이 피어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예쁘게 눈에 들어왔다. 불현듯이 온 세상이 아름다웠다. 이름이 있든, 이름을 모르든, 꽃과 나무와 사물 하나하나가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을까?”
- 슬픈 감정은 영혼을 정화한다(5/8)
‘희망의 순례자’들에게
큰 울림을 주는 책
목적지를 향해 걷는 길에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에게 감동과 위안을 얻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들로 인해 부정적인 감정에 빠지기도 한다. 자연도 마찬가지다. 햇볕이 찬란한 맑은 날은 오히려 길 위의 사람을 지치게도 한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날은 순례자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든다. 목적지에 도달한 후에도 목적지를 달리하며 이어지는 인생의 여정을 계속하기 위해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가 필요함을 저자는 몸소 체험했다. ‘순롓길은 인생의 축소판’이었다.
순롓길에서의 체험은 그 길을 걷는 이에게 유일한 체험이다. 같은 길을 함께 걸었더라도 각자의 체험은 고유하고 유일무이하다. 동시에 그 걸음은 타자와 상호 작용의 원리 안에서 존재하고 변화해 자신의 삶이 ‘되어 감’의 과정 중에 있음을 깨닫게 한다. 철학자 윌리엄 데스먼드의 ‘자기화Selving’ 개념이다. 저자는 산티아고 순롓길의 마지막 순간에 만난 ‘♡Wins!’, 사랑은 승리한다는 명제에 공감하며, 우주라는 아가페로 상호 작용하는 모든 존재가 사랑으로 주어졌음을 깨닫는다.
“우리에게 주어진 우주, 자연 생태계, 이름 없는 풀꽃, 인생 순례 중에 만난 사람들, 이 모든 존재가 사랑으로 주어졌다. 나의 인생행로 중에 한 번 만나고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이들이라도 나는 그들에게 고마워할 것이다. 나의 존재가 이미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이 내 안에 살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 존재의 공동체에서 같은 성원으로 살아간다고 믿는다.” - 글을 마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