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히 시계를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지각이다!
성난 멧돼지 같은 과장님 얼굴이
지난밤 가위눌림처럼 내 가슴을 짓누른다
젠장 아직도 꿈속인가?
04시 44분 44초
- 「꿈속에서 또 꿈을 꾸다」 부분
우원규 시인의 『꿈속에서 또 꿈을 꾸다』는 네 개의 꿈들이 혼재되어 있으며, 그는 네 개의 꿈들, 즉, “얽히고설켜 버린 미로”같은 이 꿈들의 정체를 밝혀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첫 번째 꿈은 천하제일의 악녀인 달기와 놀아나는 꿈이고, 두 번째 꿈은 미친 개들에게 쫓기다가 쌍두 아나콘다에게 잡아먹히는 꿈이다. 세 번째 꿈은 절벽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이 세상의 허망함에 치를 떠는 꿈이고, 네 번째는 아등바등 몸부림칠수록 더욱더 미로같은 혼돈 속에서 헤어날 수가 없는 꿈이다. 꿈이 악몽이고, 악몽이 현실이고, 어쩌다가 악몽에서 깨어나면 “지각”이란 생각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지난밤 가위눌림처럼” “성난 멧돼지 같은 과장님 얼굴이” 떠오른다. “04시 44분 44초”는 잠에서 깨어나 출근을 서둘러야 할 시간이고, 게오르규의 『25시』에서처럼 그 어떤 희망도, 구원의 손길도 끝난 최후의 시간이라고 할 수가 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지면 행복할텐데
그 많은 탄식과
그 많은 설움과
그 많은 눈물
우주선을 타고 시공을 초월하여 여행하는
천 년 후에도 주르륵 흘러내릴 거야
지상낙원은 항상 미래형이지
인간은 불행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어
눈물이 마르길 원치 않아
통곡이 끊기길 원치 않아
한은 계속 되어야 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슬퍼할게
행복은 내일로 미루고
- 「지상낙원」 전문
우원규 시인의 「지상낙원」은 그 명제와는 다르게 실낙원에 대한 노래이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지면 행복할 텐데”라는 시구에처럼, 자기 자신의 욕망에 대한 자책과 자기 성찰의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일류대학을 나와야 하고, 좋은 직장을 다녀야 하고, 명품 옷과 명품 차를 타고 다녀야만 한다. 아름답고 멋진 집에서 살아야 하고, 산해진미의 음식을 먹어야 하고, 어렵고 힘든 육체노동을 하지 않아야 한다. 언제, 어느 때나 만인들의 존경과 찬양을 받으며, 영원히 늙지 않는 젊음을 유지한다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탐욕의 진수이며, 이 탐욕이 “그 많은 탄식과/ 그 많은 설움과/ 그 많은 눈물”의 근본원인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부처도, 예수도 “우주선을 타고 시공을 초월하여 여행”을 다닌 적도 없고, 그들 역시도 우리 인간들의 부귀영화를 위해 그들의 자유와 행복, 또는 그들의 삶과 죽음까지도 너무나도 완벽하게 박탈당한 가공의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사찰과 교회는 부처와 예수의 지옥이고, 모든 찬양과 예배는 협박이며, 모든 돈과 예물과 고행은 차라리 전기고문과도 같은 것이다. “지상낙원은 항상 미래형”이고, 우리 인간들은 “불행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그 반대급부로서 그 화풀이의 대상으로서 부처와 예수와도 같은 가공의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눈물도 마르지 않아야 하고, 통곡도 끊기지 않아야 하고, 한 역시도 계속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요컨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슬퍼할게/ 행복은 내일로 미루고”가 우리 인간들의 「지상낙원」의 삶의 양식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적대시 하고, ‘만인 대 만인의 싸움’을 무차별적으로 전개시켜 나가는 이 ‘탐욕 만세의 세상’에서 그러나 우리 인간들이 자기 자신을 되찾고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나무는 무욕이라 무심하게 서 있다
나도 이따금씩 나무가 되고 싶다
비루한 인간의 오욕칠정을 다 버리고
말갛게 초록인 태고의 숲속에서
한 그루 하얀 자작나무로 서고 싶다
라는 「자작나무」와,
선선한 밤하늘 쏟아지는 별들을 올려다 보며
풍진 세상 오욕칠정 씻어주는
천상의 감로주
초승달에 철철 부어 들이키니
아...별빛에 취한다
기분이 좋아 날아갈 듯하다
라는 「별빛에 취하다」에서처럼 인간의 “오욕칠정”을 다 버리고, 너와 내가 다같이 손을 맞잡고 대자연의 우주쇼를 연출하면서 살아가는 길 뿐이라고 할 수가 있다. 시에는 사악한 생각이 하나도 없고, 시를 쓰는 사람은 언제, 어느 때나 자기 자신을 희생시키면서 그 언어의 별빛으로 만인들을 인도해 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다. “절에 가면/ 비우는 맛이 있어/ 참 좋다”라는 「풍경소리」처럼, 또는 “선선한 밤하늘 쏟아지는 별들을 올려다 보며” “풍진 세상 오욕칠정 씻어주는/ 천상의 감로주”를 “초승달에 철철 부어 들이키” 듯이 별빛에 취해 살아가게 된다.
우원규 시인의 『꿈속에서 또 꿈을 꾸다』는 꿈속에서도 악몽이고, 꿈밖에서도 악몽을 꾸면서 살아가는 ‘자아 없는 인간’을 노래하고는 있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 방법적인 부정 정신을 통해서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되찾고 대자연과 함께 예술품 자체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일찍이 데카르트가 신과 영혼과 천국과 지옥과 절대적인 그 모든 것들을 의심하고 또 의심했지만, 그러나 그 의심하는 나를 통해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인간의 자기 발견을 이룩해냈던 것처럼, 우원규 시인 역시도 드디어, 마침내 ‘예술품 자체의 삶’을 창출해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데카르트가 ‘신의 철학’을 ‘인간의 철학’으로 바꾼 현대철학의 아버지라면, 우원규 시인은 이 ‘탐욕 만세의 세상’에서 꿈속에서도 또 꿈을 꾸며 “천상의 감로주”를 “초승달에 철철 부어 들이”킬 줄 아는 최초의 시인이라고 할 수가 있다.
“아...별빛에 취한다.”
시인은 예술가 중의 예술가이며, 언제, 어느 때나 대자연의 지상낙원에서 예술품 자체의 삶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