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레임을 직시하기
집에 사는 식물은 목이 마르면 사람을 부른다
창밖에 고요히 흔들리고 있는
- 「비바리움」
『검은 양 세기』에서 프레임은 ‘벽’이 아니라 ‘창’이다. 『검은 양 세기』의 존재들은 표면을 통해 서로를 알아챈다. 유리 수조를 의미하는 ‘비바리움’ 속 식물의 시선이 사람을 향할 때, 그 시선으로부터 인간과 식물을 나눈 유리와 식물의 내면이 동시에 드러나는 것처럼.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지만 밖으로 절대 새어 나오지 않는 것들, 사람 안에 든 “따뜻하고 쓸쓸한 것”, 슬픔이 품은 “알록달록한 속” 또한 ‘사람’과 ‘슬픔’이라는 표면을 통해서 볼 수 있다.
풍경과 창을 동시에 보려면 창으로부터 물러서야 하듯, 김종연의 시는 표면으로부터 몇 걸음 물러선 곳에서 시작된다. 표면과 표면 너머, 그 모든 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 물러선 자리에서 『검은 양 세기』의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경계를 넘어오는 대신 경계 안에 머물며, 경계의 표면을 통해. 그러므로 그 너머를 아는 유일한 방법은 표면을 직시하는 것이다. 김종연의 시는 집요하게 표면을 본다. 과거나 미래, 다른 어떤 방향으로 달아나 우회하기를 우리에게 허락지 않는다. 오직 우리 앞에 있는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는 그 방식 그대로 보도록 이끈다. 보이는 것을 더 보도록, 아는 것을 더 알도록 우리를 현재에 붙든다.
■ 프레임을 초과하기
바깥으로 모든 바깥의 바깥으로 동시에 열리는 문
문밖에 서 있는 네게 나를 보여 주려고
이 시는 너를 읽기 위해 쓰이고 있다고
- 「에스키스」에서
『검은 양 세기』에서 기억은 대체로 망가진 프레임이다. 점차 희미해지는 기억은 망각과 오류로 가득하다. 기억의 텅 빈 구멍으로 느닷없이 착각과 환상이 생겨나고, 더 먼 과거의 기억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스며든다. 그러나 그토록 훼손되어도 프레임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훼손을 통해 제 기능을 한다. 이 망가진 프레임들은 쉽게 지워지거나 뒤집히고 서로 겹치거나 넘어서며 의식의 바깥을 향하는 통로를 만든다.
그러므로 김종연의 시에서 프레임은 그릇이나 몸처럼 명확한 물성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시집 가장 앞에 적힌 “動中動”(‘움직임 가운데 움직임이 있다.’)이 외피로 삼는 ‘움직임’처럼, 김종연의 시는 물성 없는 것들의 물성을 붙든다. 이 물성은 곧 시의 제목으로도 드러난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덧씌워 세계를 재건하는 「리부트월드」, 빛에 의해 끊기며 ‘뒤집히는 가장자리’ 「리버스림버스」, ‘그림 속의 그림’처럼 윤회하는 생 「미자나빔」, 캔버스를 초과하는 ‘거대한 밑그림’ 「에스키스」처럼. 붙드는 동시에 사라지는 것들, 나타났다 흩어지는 형체들 가운데서 우리들은 “내내 흔들리고 있는 윤곽”이 되어 무의식 깊은 곳, 환영의 더 깊은 안쪽에 도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