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花樣年華.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했던 시절. 누구나 아름답게 기억하는 지난날이 있다. 그 시절을 돌이키는 회상이 없다면 삶은 의미를 잃는다. 삶은, 점진적인 ‘난파’다. 시간은 절대 머뭇거리지 않는다. 육체는 허물어지고, 기억은 희미해진다. 어떤 관계도 영원히 이어지지 않는다. 이 도저한 시간의 파괴력 앞에서 삶은 한없이 초라하기만 하다. 사람들은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가지만, 소멸에 직면할 시간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찾아온다. 그것은 개연성 없는 사건이자 대비할 수 없는 삶의 과정이다. 자신의 삶이 단지 예외적인 기간에만 우발적으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뼈아픈 일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읽고, 생각하고, 확신하고, 발설했던 것이 진실이었음을 증명하는 시간을 통과해야 한다. 소멸이라는 영원 앞에 찰나적 삶은 환시幻視에 지나지 않은가. 실제로는 존재한 것도 아니었던 이 세상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건 어쩌면 부질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소멸에 관한 사유에 침식된다면 자아가 쌓아놓은 가치들을 부정하는 과정이 바로 삶이라고 정의하게 된다. 생명이 사소하고 평범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렇다면 글을 쓰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기억을 윤색하고 자기 위로를 거듭하면서 끊임없이 삶을 천착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다.
이승은의 신작 시집 『꽃으로는 못 올 우리』에는 소멸과 회복의 풍경이 반복된다. 시인은 삶이란 본래 허무하고 쓸쓸하다는 사실을 알고, 소멸을 망각하게 만드는 소비의 쾌락이 지배하는 세계의 질서도 잘 안다. 자신의 삶과 지금 세계가 그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살아가야 하는 시인은 다가오는 ‘소멸’을 응시하면서 “예고 없이 파고드는 셈법”으로 시를 쓴다. 시적 주체가 포착한 풍경에서 ‘나’는 묘지를 걸으며 소외된 삶을 살다 간 사람을 생각하고(「14-31호」), 울음 없는 조문객과 육개장을 먹으면서(「육개장」), “금이 간 답변 위에 덧칠”(「꽃으로는 못 올 우리」)을 했던 한때를 떠올린다. 1부에 수록된 시들은 이렇듯 시적 주체가 느끼는 회한으로 가득하다.
이제 “옛 편지를 태우”면서 “오랜 마음결”(「그늘을 놓아주다」)에 갇혀 있던 그늘을 풀어주는 시편을 만나보자. 가둔 것이 아니라 갇힌 것을, “시름없는 풍경 속에 웃자란” 그것이 “그늘의 키”인 것을 시인은 안다. “덜 여문 한마디”를 끝내 익혀내지 않고 과감히 다가올 삶을 보듬는 한 사람을 보라.
건너오고 건너가던 그 오랜 마음결은
나눠도 갈마들던 안개 혹은, 는개였다
아득한 거리에서도 발목을 서로 잡던
감춰둔 서너 통의 옛 편지를 태우는 날
한참을 따라붙던 목마른 재채기가
연기로 젖어 들면서 땅거미를 드리웠다
밖에서 바라보니 정작 내가 갇혔구나
시름없는 풍경 속에 웃자란 그늘의 키
징검돌 디뎌선 자리 이끼가 번져갔다
오디빛 하늘길을 열고자 한 나중의 밤
덜 여문 한 마디를 통째로 베어 물고
꼬리별 스러진 곳에 그림자를 낳았다
- 「그늘을 놓아주다」 전문
시간은 육신과 기억을 허문 대신 작은 선물을 건넨다. 소멸을 인식한 이후 ‘나’는 타인과 세상을 너그럽게 바라보게 된다. 상대의 거짓말을 모르는 척 끄덕이면서 믿어(「이를테면,」)주기도 하고, 멀리 있는 ‘나’에게 좋아하는 막국수를 사줄 테니까 어서 오기나 하라는(「막국수 타령」) 벗의 호기에 즐거워한다. 그러다가 누군가의 부음을 듣고서 “단호했던 뒷모습을 새겨 읽지 못했”(「못다 쓴 종장에게」)다고 자책한다. “못 부친 편지를 접듯”(「골목」)이 서성거리고 “너는 없고 나만 있는 돌담을 에두르며”(「억새」) 인연을 떠올린다. 낡은 사진을 보면서 ‘나’는 먼저 간 친지들이 건네는 듯한 말을 듣는다. 세월이 가도 사진 속의 사람은 늘 그대로가 아니던가. 웃음으로 찍힌 얼굴은 언제나 웃음으로, ‘나’보다 어린 부모님 얼굴도 오롯하다. 인화된 종이만, 시간만 늙어 있다니.
- 이정현(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