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국의주(蕃國儀注)』의 실체 규명 및 복원 시도-명에 대한 외교의례의 전범, 베일을 벗다
이 책은 고려 말기 이후 명(明)에 대한 외교의례의 전범으로 기능했으나 그간 존재가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던 『번국의주(蕃國儀注)』의 실체를 규명했다. 아울러 외교의례의 운용에서 『번국의주』를 어떠한 방식으로 활용했는지를 고려 말기를 중심으로 면밀히 탐구했다.
『번국의주』는 번국(蕃國)에서 명 황제를 대상으로 거행하는 신례(臣禮)들의 의주로, 명이 1370년(공민왕 19, 홍무 3)에 작성하여 고려에 보내준 것이다.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그 존재를 알리고 『번국의주』에 관한 기본 정보를 파악했으며, 아울러 『번국의주』는 현전하진 않아도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다고 보아, 『번국의주』의 복원을 시도하였다. 고려 말기 이후로 황제국을 대상으로 한 외교의례는 기본적으로 『번국의주』를 준용하였으니, 그러한 양상은 조선 말기까지 이어졌다.
외교의례의 전면적 전환, 원 복속기의 전환기적 의의
빈례(賓禮)나 가례(嘉禮)에 수록된 통상적 외교의례는 원 복속기에 들어서 전면적으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원 지방 관부에서 황제에 대해 거행하는 의례가 고려에 적용·활용되는 것을 통해 일어났다. 원 복속기에 대폭 전환된 외교의례는 고려 말기에 전유·계승의 과정을 통해 그 이후로도 질적 변화 없이 존속하였다. 특히 원 복속기 이후의 외교의례는 고려 전기와 달리 외교(대외) 무대에 한정되지 않고 국내에서조차 황제 신하의 위상을 구현한다든지, 황제국 지방 관부에서 황제를 대상으로 행하는 의례와 별개로 운영되지 않고 이와 동조하여 작동한다든지 하는 특징을 지녔음을 주목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중국 밖의 제후국 군주가 자국의 사자에게 표문을 건네는 과정에서 황제를 대상으로 거행한 신례(臣禮)인 배표례(拜表禮)가 원 복속하의 고려에서 처음으로 등장하여 이후 계승·존속되었다. 또한 국왕이 황제를 대상으로 행하는 망궐례(望闕禮) 역시 원 복속기에 등장하여 예식 구현의 변화를 거쳤다. 이러한 예식들이 원 복속기를 지나 고려 말기를 거쳐 조선시대에도 지속되었음은 조선 초기의 영조례 예식 정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흉례(凶禮)에 수록된 국왕 국상 시의 외교의례 또한 빈례나 가례에 수록된 통상적인 외교의례와 동질적인, 혹은 유사한 궤적을 밟았다.
『번국의주』의 해석과 구현을 둘러싼 조선과 명의 갈등-‘사대주의’ 해석은 근대적 역사인식의 산물,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조선은 명에서 전달 받은 『번국의주』를 기반으로 영조칙례(迎詔勅禮)를 운영하였으며, 명 측도 사실상 『번국의주』와 동일한 의주를 사용하였다. 그런데도 조선과 명 사신 간에는 영조칙례의 일부 예식절차를 둘러싸고 갈등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는 명에서 의례를 잘 아는 조관(朝官) 사신이 온 경우, 사전에 ‘올바른’ 예의 실천 방식이 불분명한 일부 의절을 두고 조선과 명 사신이 각자의 방식이 예에 부합한다고 고수하며 갈등이 일어나곤 한 데서 기인하였다. 이러한 갈등 양상은 민족주의적 접근에서 흔히 상정하듯 양국 간 이해관계의 충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간 이 책에서 규명한 원 복속기를 기점으로 한 외교의례 변화는 근대적 역사인식의 산물인 ‘사대주의’라는 틀로 관성적으로 독해되어오곤 했다. 이를 피하기 위해 이 책은 예(禮)에 대한 시대적 감각의 차이를 최대한 드러내고, 화이(華夷) 인식의 질적 전환과 그 방향을 밝히며, 외교의례를 둘러싼 양상을 근대 역사학의 인식적 한계를 넘어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