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로쿠잡지(明六雜誌)』는 1874년(메이지 7) 4월 2일 창간호를 시작으로 1875년(메이지 8) 11월 14일 정간 시까지 모두 43호가 발행된 잡지다. 이 잡지는 1873년(메이지 6) 7월에 미국에서 귀국한 주미대리공사 모리 아리노리가 유럽과 미국에서의 체험을 기초로, 일본의 교육개혁을 목표로 하여 같은 해 8월에 동지들과 함께 설립한 학술결사 메이로쿠샤가 만들어지면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국가 건설을 위해 국민 전체의 지적 수준 향상과 그것을 위한 교육개선의 필요를 통감한 모리는 해외의 학회에서 학자 및 지식인들과 교류한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 지식인들의 고립성과 폐쇄성을 타파하고, 지식인 간의 학문적 교류를 촉진하기 위해 학술결사를 설립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렇게 결성된 모임은 매월 1-2차례 정도의 정기집회를 가졌고, 이 모임이 1873년에 발족했기 때문에 메이지 6년(메이지 로쿠넨)에서 따 메이로쿠샤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학습한 내용을 널리 세상에 알리고 지식을 보급하는 것으로 세상의 진보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 낙관론자들이었다. 이 시대 서양에는 자연과학적 지식을 확대하고 그것을 사회에 적용하여 ‘문명’을 ‘진보’시킬 수 있다고 믿는 낙관주의적 목적론이 유행하였고, 그것이 서양의 문명을 표준으로 하는 것이었던 만큼, 그것을 일본에서 가능케 하는 데 필요한 지식과 방법은 무엇인지가 이들 지식인의 최대 관심사였다. 그것은 흔히 ‘문명개화’라는 단어로 표현되었으며, 이 단어 자체가 메이로쿠샤의 지식인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추진하는 목표가 되어 있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메이로쿠샤 지식인들이 그 ‘교육의 진보’를 위해 지식을 보급한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추진했던 것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그중 하나는 ‘연설회 개최’였고, 다른 하나는 ‘잡지의 발행’이었다. 『메이로쿠잡지』는 이런 동일한 목적을 공유한 성원들이 스스로 획득한 지식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보급함으로써 이른바 ‘문명개화’를 촉진하는 수단으로 삼고자 했던 것인데, 그러나 목적과 수단은 공유되었을지언정, 그 ‘문명개화’의 내용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견이 제시될 수밖에 없었고, 이런 논의의 다양성과 논쟁이 분출되었던 것이 이 잡지의 특징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잡지는 어떤 단일한 논의나 의도를 가진 것으로 읽어 내기보다는, 그 안에 어떤 종류의, 얼마나 다양한 ‘문명’의 궁리들이 존재했는지를 읽어 내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보다 유효한 독해법이 될 것이다.
또 이 잡지에는 당대 일본뿐 아니라 서양에서 유행하던 지식이나 사상들이 다채롭게 소개되고 있어서, 우리에게 현재 ‘상식’이나 ‘교양’으로 정착해 있는 지식의 기원과 전파의 양상을 살펴보는 데 흥미로운 단서들을 제공해 준다.
이 잡지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다. 지적 배경으로 보자면 서양학자부터 한학자까지, 연령대로 보아도 당시 27세의 모리 아리노리부터 52세의 사카타니 시로시까지, ‘남성’이라는 공통점 이외에는 모두 다른 환경과 입장에 처한 이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지식’에 대한 왕성한 욕구를 지니고 있었고, 당면한 과제로서 ‘문명개화’라는 목표를 공유했다. 메이로쿠샤라는 모임과 그 결과물로서의 잡지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지만, 그 경험과 시행착오가 이후 근대 일본의 지식계, 학술계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자양분이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지식인들의 활동에 대해 이후 철학자 오니시 하지메는 “우리 나라 유신 이후로 십수 년간은 오직 계몽적 사조의 정신으로 돌진”하였다고 평가했다. 이것이 일본에서 ‘계몽’이라는 단어의 첫 사용 사례이자 번역 사례임을 생각하면, 앞에서 살펴본 일련의 움직임들이 근대 일본에서 전개되었던 초기 ‘계몽’의 양상들이며, 『메이로쿠잡지』는 이런 양상들을 생생하게 담아 전해 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