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 시대에 최고의 예술로 추앙받던 음악
그 음악가들의 홍보 수단이던 초상화
모차르트 그림 하나쯤은 가져야 고매한 취향을 뽐낼 수 있던 시대
먼 나라에 사는 생면부지의 음악가도 이름만 알면 인터넷 검색으로 사진을 쉽게 볼 수 있는 시대다. 작곡가나 연주자는 홈페이지를 만들어 놓고 다양한 포즈의 프로필 사진을 곁들여 활동상을 알리느라 바쁘다. 요즘은 유튜브를 통해 음악가의 일거수일투족을 생중계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진이 보급되기 전 음악가의 초상화란 권력층이나 부유층, 아니면 음악가 자신이나 가족 또는 그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이 책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부터 졸탄 코다이까지 34명의 작곡가 초상화와 기념상을 시대순으로 정리하고 화가와 음악가 간의 숨겨진 이야기, 장르를 넘나드는 우정과 그들의 인생을 담았다.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초상화라면 그 작품의 탄생 배경에 주목해 보자. 생생한 당시 유화, 수채화, 판화, 사진, 캐리커처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남아있는 동상, 흉상, 기념비, 데스마스크, 부조 등의 입체 작업까지 고루 담았다. 저자가 ‘음악과 미술의 만남’을 주제를 다룬 두 번째 작업이다.
허공으로 사라지고 마는 청각예술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해 보려는 몸부림으로 세운 수많은 동상과 기념비들…
음악가를 그린 초상화는 작곡가의 얼굴을 충실히 재현하려는 데 있지 않다. 작가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모든 초상화는 화가의 손끝에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상화, 미화, 영웅화, 신격화되는 페르소나다.
최근 모차르트의 두개골을 가지고 생전 모차르트의 모습을 복원했다. 우리가 흔히 알던 바르바라 크라프트의 초상화에서 흰색의 소라 모양의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빨간 옷을 단정하게 입고 있는 모차르트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닮게’ 그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위대한’ 작곡가로 보이게끔 하는 게 목적이었을 것이다.
음악가의 초상화란 음악을 눈으로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예술이다. 영상도, 사진도 없던 시절, 연주되는 음악은 오로지 현장 연주를 통해서만 향유할 수 있다. 따라서 흘러가는 음악은 유한한 시간성을 가지고 속절 없이 흘러가고 그 아름다움을 영원히 붙잡을 방법은 없다. 그래서 작곡가(음악가)는 화가 앞에 자리했다.
음악가들의 초상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지대했다. 하이든이 유럽 최고의 작곡가로 인기를 누릴 때 때마침 판화로 제작된 초상화를 모으려는 열풍이 불었다. 유명인의 이목구비를 닮아보려는 심리에다 이제 막 생겨난 셀럽 문화가 초상화 수집을 부채질했다. 어떤 작곡가의 초상화 사본을 수집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음악 취향 수준이 판가름 났다.
음악가에게 초상화는 대중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수단이었다. 음악계에서 성공하려면 가능한 모든 홍보 수단을 동원해야 하는데 그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이든도 초상화 제작을 위해 화가의 스튜디오에 기꺼이 방문했다. 유화나 드로잉 등 오리지널이 있어야 이를 바탕으로 판화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이든과 계약을 맺은 출판사에게 초상화는 악보 판매를 위한 홍보 수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든과 악보출판사는 운명공동체였다.
18세기 이후 작곡가의 초상화는 유화뿐만 아니라 판화, 실루엣 등 다양한 매체로 제작되면서 개인 소장의 사적 영역에서 서점, 악보 가게, 미술 상점 등에서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공적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중산층을 위한 공공 음악회가 급성장하면서 음악애호가들 사이에서 판화로 제작된 작곡가 초상화의 컬렉션 붐이 일었다. 유명 음악가의 초상화 판화를 많이 소장할수록 예술적 안목이 높다는 증거로 여겼다.
19세기 중반부터는 사진 초상화가 주요 홍보 수단으로 떠올랐다. 프란츠 리스트는 어떤 작곡가보다 사진 스튜디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수십 년에 걸쳐 250여 종의 다양한 사진을 남겼다. 19세기 영웅 숭배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작곡가 기념상은 문화적 정체성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오스트리아 빈이 ‘음악의 도시’로 발돋움하는 과정에서 시내 곳곳에 세운 수많은 음악가 기념상과 기념관이 적잖이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 미국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에 세운 베토벤과 베르디 기념상은 각각 독일계와 이탈리아계 이민 사회에서 건립했다.
포토 저널리즘으로서의 초상화
로시니, 오펜바흐, 베를리오즈, 리스트, 베르디, 바그너 등 유명 음악가들은 캐리커처로 유명세를 톡톡히 치렀다. 처음엔 가까운 사람들끼리 재미 삼아 스케치를 주고받다가 판화로 제작되어 풍자신문의 1면에 등장하기도 했다. 캐리커처는 특정 작곡가와 그의 음악을 당대의 청중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시금석이다. 신문에 실린 평론의 옳고 그름을 떠나 당시의 지배적인 여론을 담아낸 일종의 다큐멘터리이자 포토 저널리즘이다. 캐리커처는 특징적인 동작이나 자세를 과장하고 비틀어 독자의 웃음을 자아내는 한편 세간의 평가를 한 치의 양보 없이 반영했기 때문이다. 초상화는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를 담는 데 반해 캐리커처는 작곡가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거울처럼 비춘다.
결국, 작곡가의 초상화는 음악도상학(Iconography of Music)의 중요한 연구 대상으로서 그 가치가 높다. 작곡가의 초상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이유는 당대 또는 후세의 평가가 그림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뇌리에 박힌 특정 작곡가 이미지도 그림이나 조각, 영화를 통해 조작되거나 부풀려진 신화 조작의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