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대신에 내가 될 수 있고
나 대신에 네가 되어 줄 수 있는 것들.
그러니까 기선아, 절대 지지 마.
- 남궁지혜 「팔뚝의 노릇」
어느 날 ‘선양’에게 오랜 친구 ‘기선’의 전화가 걸려 온다. 남편에게 줄 선물로 가구를 조립하려고 하는데 팔을 다쳐 혼자 할 수 없다고, 함께 조립해 줄 수 있느냐는 요청이다. 비혼주의자인 선양은 기선의 부탁이 탐탁지 않다. 꺾이지 않는 올곧은 성정을 가졌던 기선이 결혼 이후 남편을 위해 희생만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열다섯 살부터 단짝이었던 선양과 기선은 농담처럼 함께하는 미래를 그려 보곤 했었다. 수많은 미래를 쓰고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며 함께 늙어 갈 수 있을 거라고, 세상과 시절에 꺾이거나 지워지지 않도록 언제나 서로에게 팔뚝을 내밀어 줄 거라고 선양은 믿었다. 하지만 기선의 결혼 이후, 이 미래엔 자꾸만 기선의 남편이 침입하게 된다. 「팔뚝의 노릇」은 “같은 교실에서 매일 얼굴을 마주하던 친구와의 관계가 대학 시절과 결혼 생활을 거치면서 이전과 다른 양상으로 변모할 때, 그와 더불어 변하는 사랑과 의존의 다면적인 복잡성을 수용해야만 하는 이의 불가피한 성장통”을 그리며, 무언가를 지키고자 하는 누군가를 위해 팔뚝을 내민다.
냉혹한 세상의 이치.
냄새가 좋아야 비로소 어떻게 생겼는지 눈에 들어오고
또 잘생겨야 말도 걸고 싶어지지.
- 돌기민 「불가마 메이트」
찜통 같은 더위가 계속되는 세계. 기후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동물들은 멸종했고, 땀을 줄줄 흘리는 인간들에게는 ‘오도르’라는 복족류가 붙어 있다. 이 오도르는 인간의 땀을 양분으로 삼는 자웅동체 생물이다. 오도르가 만들어 낸 배설물은 특유의 향을 뿜는다. 그래서 오도르는 어떤 인간에게는 (악취를 뿜는) 기생생물처럼 느껴지고, 어떤 인간에게는 (향기를 뿜는) 공생생물인 것처럼 느껴진다. 악취 나는 이는 연애도 일도 순탄치 않고, 향기 나는 이는 그 향기 덕에 인기를 얻고 돈을 벌지만 그의 향기를 이용하려는 인간들에게 이용당하기 일쑤다. 이렇게 「불가마 메이트」는 체취가 인간의 사랑과 우정에서부터 삶의 방식까지 결정짓는 사회를 배경으로, 악취를 풍기는 ‘ㅎ’과 향기를 풍기는 ‘ㅇ’의 공생인지 기생인지 모를 미묘한 관계를 그린다. 또한 이 소설은 비인간인 오도르 ‘상우랑이’, 상반되는 체취를 가진 ‘ㅎ’과 ‘ㅇ’, 세 명의 화자를 등장시켜 특유의 어투로 “시점의 다각화를 통해 사랑의 불가능성과 그리하여 기생으로만 가능한 사랑의 구조를 환유적으로 보여” 준다.
깊은 자상과 모유, 절망과 희망.
강인하잖아. 상처받고도 포옹하려 했던 점이 좋아.
- 양기연 「홀로틀의 포옹」
부모님을 여의고 남겨진 두 자매, 언니와 함께 의지하며 살아가던 ‘나’는 어느 날 언니의 임신 소식을 듣게 된다. 자발적 비혼모인 언니는 산후 우울증으로 아이를 돌보는 데 어려움을 겪고, 나는 언니를 도와 조카 보윤을 살뜰히 보살핀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로 디자인 회사의 인턴직을 제안받게 되지만, 부모님의 죽음 이후 ‘나’를 위해 젊은 시절을 고스란히 희생한 언니의 마음을 외면하고 떠나기란 쉽지 않다. “서로를 안는 일이 미안함과 부채감으로 행해진다면 그 관계와 마음은 결국 언젠가는 위태로워질 테고, 각자의 생이 서로에게 저당 잡혀 있다는 감각은 종국에는 원망으로 치달을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뚜벅뚜벅 자신의 생을 향해 홀로 걸어간다. 사랑하는 이들을 과거의 빚 속에서 원망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것을 깨끗한 마음으로 껴안을 수 있는 미래의 날들을 위해서”라는 전승민 평론가의 해설처럼, 이 소설은 경계에 선 이들의 등을 조용히 앞으로 밀어 주며, 타인에게 품을 내주기 위해서는 내 안에 자신을 위한 품이 먼저 필요함을 깨닫게 해 준다.
“대체 그런 곳에 왜 가신 거야?”
왜냐고? 나는 눈을 깜빡였다.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마룻바닥 위로 똑똑 떨어졌다.
[…]
“축복…….”
언니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축복받으려고.”
- 양수빈 「숲속에는 축복이」
열다섯 살이던 7월의 어느 날, ‘예정’은 숲 난임 센터로 입소를 결정한 부모님의 뜻에 따라 외삼촌네 집에 맡겨진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혼란한 와중에도 예정은 사촌 언니 예주와의 생활이 나쁘지만은 않다. 외삼촌에게 언니를 감시하라는 특별한 임무를 받기 전까지는. 하지만 예정의 서툰 감시 임무는 예주에게 금방 들통나게 되고, 예주는 그런 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예정의 부모가 입소한 숲 난임 센터로 데려다주겠다고. “한 인간이 자라서 경험하는 최초의 트라우마가 발생하는 진원지로서 폭력은 집 안에서 태어난다. 양수빈의 「숲속에는 축복이」는 그 ‘집’의 토대가 되는 이성애 섹슈얼리티, 그 위로 덧씌워진 자연이라는 신화적 코드를 섹스의 그로테스크함과 폭력적인 사랑의 관계를 경유해 탈신화”하며 어떤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함께 “사건 속으로 같이 뛰어드는” 타인이 필요함을, 그래서 인간은 다른 인간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나는 선생님과 채영에게서 무언가를 본다.
저건 애쓰는 얼굴들. 무사하기 위해 애쓰는 얼굴들.
아무도 울지 않고. 그런데 왜 마음이 들끓는 거지?
- 윤단 「친구를 데리고」
이 소설은 어떤 하루를 그린다. 친구를 데리고 선생님을 찾아가게 된 하루. 인적 드문 어느 지방 소도시에서 보낸 느린 하루. 언뜻 보기엔 담담하고 잔잔한 하루. 친구에게 잠꼬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이사를 앞둔 선생님 집에 놀러 가고, 함께 마트에 가서 장 본 것을 나눠 들고, 밤엔 잠든 친구가 정말로 잠꼬대하는 것을 듣는 하루. 그런데 ‘나’의 회상을 통해 이들에게 벌어졌던 과거의 일들이 조금씩 드러난다. 다들 마냥 무결하지 않고, 그렇다고 마냥 나쁘지만도 않아서 우리는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은 채로, 그저 이들의 하루를 고요히 따라가게 된다. “어느 선한 사람은 사라지는 그 순간에조차도 자신의 손길이 스쳤던 것에 새겨진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것이 마지막 과업이라 여기기도 한다”는 전승민 평론가의 해설처럼, 이 소설은 슬픔이 범람하여 다른 밭들까지 뒤덮지 않게 애써 끌어안고 있는 모양새를, 그 엉망진창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담하게 지켜본다.
음식은 그저 음식이지 않고,
입은 그저 입이지 않다.
그것은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생과 사에 개입하며
특정한 리듬 안에 잠기게 해 준다.
- 이서수 「미식 생활」
먹방 유튜브와 요리사들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인기를 끄는 지금의 한국에서, 이 소설은 먹는 행위가 얼마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지, 각각의 형태가 무엇에서 기인해 어디로 가닿는지 톺아본다. 맛집 투어를 유일한 재미와 욕망으로 여기고 미식 생활에 열을 올리는 ‘나라’, 삶에 대한 의욕뿐 아니라 입맛까지 잃어 술만 마시는 ‘호린’, 활동하고 기능하는 몸이 아닌 인스타그램에 박제된 이미지로서의 몸을 위해 먹고 토하는 ‘미라’, “식사도 노동”이라고 말하며 식탐을 주체하지 못하고 뜨거운 음식을 찾는 ‘팀장’과, 패배감을 매운 음식으로 푼다는 ‘남자의 아버지’까지. 미래에 대한 낙관을 잃은 세대, 그래서 충족하기 쉬운 미식의 즐거움에 빠져드는 지금. 하지만 이러한 “여러 개의 식탁을 뒤로하고 소설이 궁극적으로 뒤좇는 것은 서로 다른 갈림길에서 멀어지는 듯 보이는 우정의 행방”이다. 결국 우리는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상 누구와 함께 먹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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