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I장에서는 조선왕조가 건국되고 15세기에 이르기까지 주요한 재정제도의 정비과정과 그것의 의의를 살펴본다. 여기서 저자는 조선전기 재정제도의 주요한 특징으로 ‘국가세입의 확충’과 ‘왕실재정의 축소·정비’를 꼽고 있으며, “조선왕조는 애초에 왕실가족에게 부여한 경제적 특권을 포기하고 공적 통치구조 속에서 왕조의 유지와 권위를 확인받기 위한 장치를 만들어갔다.”고 말한다.
II장에서는 양란 이후 왕실구성원이 물리적으로 늘어나는 한편, 이들이 토지와 내탕을 늘려가는 양상과 이를 견제하는 신료들의 반대와 국왕의 조치를 살펴본다. 저자는 “17세기 내내 공납제를 개혁하고 양전사업을 새로이 진행하여 국가 세수를 늘리려는 노력이 진행된 것과 동시에 정부의 묵인하에 왕실궁가와 아문에서 사적으로 점유하여 세를 거두는 토지들 역시 증가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왕실재정을 공식적으로 제약하기 시작한 것은 숙종 21년(1695) 을해정식(乙亥定式)이 제정되고부터였는데, 하지만 “왕실구성원의 일상생활을 지탱하고, 각종 의례와 왕실연회에 소비되는 물자에 대한 수요는 항식 없이 늘어나고 있었다.”고 말한다.
III장에서는 『탁지정례』의 간행으로 대변되는 영조 대 중앙의 경비절감정책을 상세히 살펴본다. 저자는 영조 대 재정정책이 “숙종 대 조정에서 긴장감 있게 논의되어 온 재정 현안들에 합의점을 찾는 동시에, 운영상의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고 말한다. 특히 영조는 재위 25년이 되는 해에 중앙의 경비지출이정안인 『탁지정례』를 간행하여 궐내 왕실가족에게 지급되는 물품을 10만여 석가량 줄여놓는 조치를 취하였는데, 이는 중앙재정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왕실재정을 최우선적으로 긴축해 놓은 것이다.
IV장에서는 정조가 즉위한 후 영조의 정책기조가 어떻게 유지 또는 변화되었는지를 궁방전의 축소, 진상제도의 정비, 장용영 신설 등의 정책 사안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저자는 “정조는 영조 대 중앙재정을 상당부분 감액 조정한 영조의 정책을 이어받아 지방의 현물진상까지 정비하는 노력을 보였다.”면서 뿐만 아니라 “병신정식을 단행하여 왕실궁방에 지급한 2~3만 결가량의 면세지를 호조의 수세지로 돌려놓았으며, 왕실에 지급되는 노비 신공의 액수도 감액 조정하였”고, “주요 재무관서의 보유고를 쌀과 포목, 동전 등 총액으로 보고받아 중앙재정을 집권적으로 관리하였으며, 내수사의 재원을 공적 재원으로 표방하고 화성건설의 자금으로 활용함으로써 한정된 재원으로 국정을 장악하고 천도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고 말한다.
V장에서는 마지막으로 이러한 영·정조 대의 재정정책 이후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어떠한 파급효과를 낳게 되었는지, 재정개혁의 양면적 속성을 살펴본다. 저자는, 19세기 전반은 순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조와 정조가 이루어 놓은 재정개혁의 여러 원칙들이 흔들리는 시기였다고 하면서, “주목할 점은 고종의 즉위 초 개혁정책 역시 영조와 정조 대의 정책을 모델로 한 것”이고, “19세기까지 손상익하(損上益下)와 궁부일체(宮府一體)의 재정이념을 실현해가고자 한 영조와 정조의 노력은 다가올 개항과 근대를 준비해야 하는 고종에게 그대로 투영되고 있었다.”고 말한다.
결론에 해당하는 「나가며 : 18세기의 유산, 19세기의 그림자」에서 저자는 “영·정조 대의 재정정책은 결국 한정된 세입으로 왕실과 나라살림을 최대한 긴축, 절약해 운영하고자 한 왕조국가의 노하우를 응집해 놓은 결과물”이라고 하면서, 그러나 문제는 “18세기 왕조가 구축한 제도적 유산이 19세기에 그림자로 작용”하였음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영·정조 대의 재정정책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로 마무리한다. “18세기 중엽에 형성된 재정관서의 합설과 재원 이획은 소규모의 세입으로 중앙정부의 살림을 지탱하기 위한 최선의 방안이었으며, 이러한 재정운영 방침은 『육전조례』가 간행되는 시점까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갑오개혁이 단행되기 이전, 두 세기에 걸쳐 조선 정부가 점진적으로 구축해 놓은 제도적 유산은 19세기 재정상의 위기를 타개하는 데 분명 한계가 있었지만, 왕실이 솔선하여 재정절감의 모범을 보이고, 정부에서 백성의 세 부담을 줄여주는 변통안을 지속적으로 모색하였던 역사적 경험은 동시대 다른 왕조국가에서 찾아보기 힘든 사례로서, 여러 위기 상황에서도 조선왕조를 장기지속시킬 수 있었던 숨은 원동력으로 작용하였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