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용하는 사람, 이용당하는 사람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
‘지홍’은 가까스로 대기업에 입사하지만 9년째 대리 직급에 머물러 있다. 지방대 출신이라는 꼬리표 때문인지 몇 년째 중요한 업무는 맡지 못한 채, 팀장 ‘재욱’의 잡다한 일을 처리한다. 그러던 어느 날, 건강검진을 위해 찾은 병원에서 대학교 동기인 ‘승훈’을 우연히 만난다. 십여 년 만에 ‘승훈’과 마주한 순간 기억 저편으로 묻어 까마득하게 잊고 지냈던 그날의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오르려 한다.
‘지홍’은 누군가를 이용해 자신의 삶을 지키려 하지만 결국 이용만 당한다. 그가 ‘재욱’을 믿었던 이유는 자신을 더 높은 자리로 올려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재욱’은 그를 이용만 할 뿐이다. ‘승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홍’은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다. 그는 피해자이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를 버리고 짓밟았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날에도 그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의 위치에 있었다. 이처럼 소설은 개인이 불합리한 현대 시스템 속에서 얼마나 쉽게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 그럼에도 다시 날개를 펴기 위해서
이정연 소설가는 이 소설을 통해 개인의 선택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지홍’은 처음에는 자신이 선택한 길이 최선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이 점점 더 소모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대학 시절 연기했던 ‘셸리’, 해맑고 자신의 꿈을 위해 노력하는 ‘셸리’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re, 셸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려는 한 여성의 이야기다. 그는 더 이상 타인의 도구로 남아 있기를 거부하며,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자 한다. 결국 이 소설은 생존을 넘어, ‘나’를 지키기 위한 싸움에 대한 이야기이다. 부조리한 사회에서 지홍은 자신을 이용하려는 자들에 의해 끝없이 흔들리지만, 결국에는 그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일으켜 세운다. ‘지홍’이 과거와 마주하고, 자신을 이용하려 했던 자들에게 맞서며 내리는 선택은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닿을 수 있는 이야기다.
▶ 퍼즐처럼 맞춰지는 진실
『re, 셸리』는 속도감 있는 전개와 촘촘한 서사의 사건들로 독자를 몰입하게 만든다.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며 진행되는 이야기 속에서, ‘지홍’의 선택이 어떻게 그를 궁지로 몰아넣었는지를 한 겹씩 벗겨낸다. 소설은 ‘지홍’에게 닥친 두려움과 그녀가 과거에 저질렀거나 외면했던 일들이 맞물리며 서서히 진실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독자는 그녀가 누구에게 이용당하고 누구를 이용했는지, 사건의 실체가 무엇인지 퍼즐을 맞추듯 따라가게 된다.
이정연 소설가는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감정이 절제된 묘사로 인물들의 내면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야기 속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목적을 위해 움직이며, 누구도 완전히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 이러한 캐릭터 구성은 인간의 욕망과 생존 본능이 만들어내는 복잡한 윤리적 딜레마를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