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캐디에서 한국 골프계의 살아있는 전설이 되기까지
한국의 골퍼들은 주로 벤 호건, 잭 니클라우스, 타이거 우즈 등 외국의 전설적인 선수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골프를 배웠다.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볼 스트라이커가 벤 호건인지 아니면 타이거 우즈인지 열띤 토론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골프 지식이 높은 사람도 많다. 하지만 한국 프로골프의 역사와 함께하고 발전시킨 영웅들에 대해 들어 본 골퍼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전기는 그중에서도 골프를 시작한 지 70주년을 맞이한 한장상의 생애를 돌아보며, 그 시대의 한국 골프 역사와 발전에 대해 알아보고자 출간되었다.
1955년 군자리의 서울컨트리클럽에서 캐디 생활을 시작한 한장상은 골프 볼을 처음 쳐본 지 6년 만인 1960년 KPGA 선수권대회에서 첫 우승을 차지한다. 남자 프로 골프 대회가 한국오픈과 KPGA 선수권대회 두 개밖에 없던 1960년대는 그야말로 한장상의 독무대였다. 1960년부터 1972년까지 한국오픈에서 4년 연속 우승을 포함하여 7승을 했고, KPGA 선수권대회에서도 4년 연속 우승을 하면서 7승을 기록했다. 한장상은 국내에서 19승, 일본에서 3승의 기록으로 은퇴했지만, 당시에 프로 대회가 10개만 있었더라도 그의 우승 기록은 50승을 훌쩍 넘겼을 것으로 추정한다. 키 168센티미터에 다부진 체격을 가진 한장상은 팔심이 유난히 강해서 팔씨름으로 그를 이기는 선수가 없었다고 한다.
한장상의 최고 전성기는 1972년 일본오픈에서 당시 일본 골프계의 최고 스타 ‘점보’ 오자키를 한 타 차로 누르고 우승했을 때이다. 이때 그의 나이 서른네 살이었다. 일본오픈 우승자의 자격으로 이듬해 1973년 마스터스에 초대되었고, 한국인 최초로 마스터스에 출전하는 영광을 누렸다. 비록 한 타 차이로 컷을 통과하지 못했지만, 낯선 코스와 잔디 그리고 시차에 적응하지 못하고 출전했던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한장상의 기량은 미국 PGA 투어의 최고 수준 선수에 비해서도 크게 뒤처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6대 한국프로골프협회 회장과 초대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회장을 역임하며 한국 프로골프의 발전에 공헌한 한장상은 지금도 KPGA 대회의 모든 중계방송을 챙겨보며 후배들의 활약상을 지켜보고 있다. 이런 한장상의 성공담은 세계적인 위대한 골퍼들과 매우 흡사하다. 가난한 캐디로 골프에 입문해서 필사적인 연습을 통해 한국 최고의 골퍼가 되는 과정은 미래의 선수들에게 남기고 싶은 최소한의 이야기들이다.
한장상에게 골프는 삶을 위한 투쟁의 수단이었다. 벤 호건이나 게리 플레이어만큼 연습을 많이 하면서 연습만이 살길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한장상에게 골프의 기술을 가르쳐준 사람은 없었지만 연덕춘을 모방하며 스윙을 만들어 나갔다. 자기만의 스윙이 완성될 무렵, 그 스윙을 버리고 새로운 스윙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이 결심은 한장상을 전설의 골퍼로 만들어 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그가 골프의 천재였음을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이기도 하다.
한장상에게 골프 이외의 다른 인생은 없었다. 그가 한 시대를 제패할 수 있었던 이유는 경쟁자들을 뛰어넘는 생존 본능과 투쟁력, 그리고 그들과 다른 수준의 강심장을 가졌기 때문이다. 학력이 부족했고 외국어를 배우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 문화에 대한 적응력이 높았던 것은 그가 얼마나 명석한 두뇌를 가졌는지 증명해 준다. 한장상은 한 시대를 풍미한 한국 최고의 골프 영웅이지만, 대중들은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 지금은 골프 인생을 마무리하며 쓸쓸하게 퇴장하는 노익장의 모습만 남아 있다. 이 전기로 인해 골프 인구가 적었던 시절의 외로웠던 영웅이 현재 골프 번영기의 스타로 재탄생하기를 바란다.
한국 프로골프의 위대한 다섯 영웅들
한국 프로골프의 역사는 최초의 프로골퍼였던 연덕춘으로부터 시작된다. 1941년 스물다섯 살의 젊은 나이에 일본오픈을 제패한 그는 일제 치하에 일본에 가서 그들을 꺾고 우승했다는 신문 기사만으로도 우리 국민들에게 위로와 자부심을 전해주었다. 1968년에 설립된 한국프로골프협회(KPGA)의 2대 회장을 역임하면서 프로골프 발전에 힘을 보태다 2004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골프를 어떻게 배우고 훈련했는지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난 것이 매우 애통하다.
연덕춘에 이어 나타난 두 번째 골프 영웅인 한장상은 1958년 한국에 프로 골프 대회가 생긴 이래 최초로 나타난 스타플레이어이다. 한장상의 최고 전성기는 1972년 일본오픈에서 당시 일본 골프계의 최고 스타 ‘점보’ 오자키를 한 타 차로 누르고 우승했을 때이다. 이때 그의 나이 서른네 살이었다. 일본오픈 우승자의 자격으로 이듬해 1973년 마스터스에 한국인 최초로 출전하는 영광을 누렸다. 비록 한 타 차이로 컷을 통과하지 못했지만, 낯선 코스와 잔디 그리고 시차에 적응하지 못하고 출전했던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한장상의 기량은 미국 PGA 투어의 최고 수준 선수에 비해 크게 뒤처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상호는 KPGA 최다승인 43승의 신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2위 박남신이 20승으로 23승이나 차이가 나는 것을 보면 그의 기량이 얼마나 독보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중학교 3학년 때 용돈을 벌기 위해 뉴코리아CC에서 볼 줍기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골프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프로 테스트에서 여섯 번이나 떨어지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훈련을 계속하는 끈기와 집념을 가지고 있었다. 1978년 여주오픈에서 당시 한국 최강이던 한장상을 꺾고 첫 우승을 거둔 후, 2005년 50세의 나이에 매경오픈에서 당시 KPGA 최고령 우승 기록을 세우기까지 꾸준히 활약한 한국 골프의 신화적 존재이다.
최경주는 1999년 한국인 최초로 PGA 투어의 Q-스쿨에 합격하면서 2000년 시즌의 PGA 투어카드를 획득하여 후배 선수들에게 미국 PGA 투어 진출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했고, 실제로 그 이후 많은 한국 선수들이 PGA 투어 진출에 성공했다. PGA 투어 한국인 최초로 우승을 달성하면서 8승, 유러피언 투어 1승, 아시안 투어 6승, 일본 투어 2승으로 해외에서 17승을 달성했고, KPGA 투어에서도 17승을 올렸다. 50세가 넘어서 진출한 PGA 투어 챔피언스(PGA Tour Champions)에서도 2024년 시니어 디오픈을 포함해 메이저 2승을 하면서 그의 우승 행진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양용은의 우승 횟수는 다른 골프 영웅에 비하면 충분해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한국의 골프 영웅으로 선정한 이유는 골프 역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양용은은 2009년 PGA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거두며 아시아 최초의 메이저 챔피언이 되었다. 마지막 라운드에서 타이거 우즈에게 2타 뒤진 채로 출발한 양용은의 역전 우승 스토리는 골프 역사상 가장 위대한 3대 역전 드라마에 선정되기도 했다. 타이거 우즈는 그 패배가 자기의 골프 커리어에서 가장 가슴 아픈 패배였다고 고백한 바 있다. 골프 세계사가 인정하는 골프 영웅이라면 한국의 골프 역사에서도 당연히 영웅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양용은 이후에도 한국 남자 선수들의 PGA 투어 활약은 그야말로 전성기를 맞이했다고 볼 수 있을 만큼 좋은 성적을 내고 있으며 국내에서 활동하는 KPGA 톱 플레이어들도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골프 영웅의 반열에 오를 정도로 두드러진 성적을 보여준 선수는 없다. 골프 팬들은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