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정치적 동물(political animal)’-정확하게는 ‘폴리스적 동물’이라고 정의했지만, 경제학이 보기에 인간은 ‘경제적 동물’이다. 마르크스도 지적했듯이 인간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은 바로 자기자신을 물질적으로 재생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경제학은 자신의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실천하는 인간을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라고 부른다.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대학에 들어와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호모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마음 속 깊은 울림을 느꼈다. 생각하는 사람, 똑바로 선 사람, 도구를 만드는 사람 등등 인간을 지칭하는 많은 이름들 가운데 호모 이코노미쿠스란 과연 어떤 인간형을 말하는 것일까? 당연히 경제학을 더 공부하게 되면 이 신비로운 인간을 만나게 되리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정작 어떤 경제학 교과서에서도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누구인지 제대로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 물론 가끔은 호모 이코노미쿠스란 이기적 동기를 가지고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정도의 설명을 각주처럼 언급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것은 호모 이코노미쿠스에 대한 인상(impression)일 뿐 정의(definition)는 아니다. 이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일인데, 수학에서 어떤 명제를 증명할 때 공준을 사용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먼저 그 공준을 명료하게 정의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런데 경제학은 호모 이코노미쿠스라는 인간형을 가정하면서 그에 대한 정의는 전제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참 의아하다. 어쩌면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정의는 너무 자명해서 굳이 정의할 필요조차 없는 것일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실제로 많은 경제학자들은 그렇게 여길 것이다. 더 나아가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굳이 정의하려 드는 일은 무의미한 노력일 뿐이라고 여기는 경제학자들도 많을 터다. 하지만 그렇게 자위하고 넘기려 해도 여전히 미진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애덤 스미스를 비롯해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분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게 된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수천년의 역사를 가진 철학이나 물리학에 비해 경제학은 불과 이백 수십년의 역사를 가졌을 뿐이다. 따라서 옛 학자들이 철학이나 물리학에 관심을 가지는 일은 비교적 자연스런 일일 수도 있지만 경제학의 경우는 다르다. 애덤 스미스를 비롯해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분들은 거의 허허벌판에 경제학의 전당을 건축한 것이나 다름없다. 마치 낯선 곳을 찾아 떠나는 모험가들처럼 그분들은 왜 그토록 무모하게 결과를 기대하지도 못할 낯선 학문의 영역으로 들어간 것일까? 우리는 그분들이 남긴 경제이론들을 배우고 또 가르치지만 정작 그분들이 그런 경제 이론들을 탐구할 때 어떤 지적 욕구를 가지고 있었는지, 무엇을 증명하거나 표현하고자 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애덤 스미스가 남긴 책이나 논문을 읽고 연구하는 일을 넘어 그는 과연 어떤 책을 읽었을까? 또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경험들을 했을까?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그분들의 학문적, 사상적 편력을 추적해 가다 보면 결국 경제학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도달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과 같다. 일상에 분주하다 보면 우리는 자주 내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경제학도 마찬가지다. 경제학은 자주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하는 질문을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자기를 향한 질문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다. 책의 본문에서도 썼지만 나는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규정하는 여러 속성들 가운데 자기이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딸들에게 배신당하고 광야를 떠돌던 리어왕(King Rear)은 “내가 누군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하고 울부짖는다. 하지만 누구도 그가 누군지 말해 줄 수 없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누가 나를 알겠는가? 연구 분야는 서로 다를지라도 모든 인문학(Humanities)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에 대한 탐구일 수밖에 없다. 직접적으로 호모 이코노미쿠스라는 이름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경제학의 아버지들이 이 새로운 학문의 전당을 건설할 때 당연히 그분들의 마음 속에는 인간에 대한 자신들만의 관점과 철학과 사상이 없었을 리 없다. 나는 바로 그런 마음이 궁금하다.
이 책은 몇 해 전에 냈던 『철학으로서의 경제학』과 짝을 이룬다. 미술에서 쓰는 용어를 잠시 빌리면, 『철학으로서의 경제학』은 이 책을 쓰기 위한 에스키스(esquisse)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늘 마음 속에 두고 있으면서도 정작 이 책을 쓰게 될는지는 스스로도 그다지 자신이 없었다. 내가 구상한 책을 쓰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준비가 필요한 데다가, 막상 집필을 시작하더라도 언제나 끝낼 수 있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뜻하지 않게 한국연구재단으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게 된데다가, 피앤씨미디어의 박노일 대표께서 선뜻 출판을 맡아 주신 덕분에 이 책이 나올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한 마음이다. 연구와 집필을 방해하는 이런저런 곁다리 일들에 관심과 집착을 버리려 애썼던 덕분도 있는 듯싶다. 가족들과 선후배 동료들께 감사하며, 피앤씨미디어 편집부 여러분의 노고에 다시 한번 더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