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는 사라지고 물질만 남은 우리의 자화상
개인과 세계의 부조리한 이야기
소설 문학이 해낼 수 있는 서사의 힘
장르소설의 추리적 흐름과 본격문학의 사유가 빚은 마술적 리얼리즘
영화를 보는 듯한 서사의 흐름과
퍼즐 같은 캐릭터와 서사의 치밀한 배치가 이 소설의 힘이다
『그랑호텔의 투숙객들』은 120년의 시공간을 통해 우리 욕망의 궤적을 추적하고 있다.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해방 직후와 1999년 새천년을 앞둔 우리의 모습과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거치며 우리의 욕망이 어떻게 변해왔고, 지금 누가 어떤 욕망을 추구하는지, 그 실체를 따라간다. 그리고 현재, 이 중심에는 엘리트와 지식인이 있다. 이 세계에 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이기적인 자의식과 자신들의 안녕에 대한 고군분투만 있을 뿐.
소설의 재미 2가지
퍼즐처럼 배치된 ‘추리적 요소’와 ‘인문적 질감’이 가독성과 사유를 이끈다
『그랑호텔의 투숙객들』은 소설이라는 문학적 형식에 인문적 사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불교와 사르트르를 사유케 하는 서사의 결은 소설의 장르적 경계를 뛰어넘어 장르소설과 본격문학의 기질을 한 이야기 속에서 만나는 경험을 하게 한다. 4천 매가 넘는 긴 소설이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은 이야기의 전개와 긴장감은 장르 소설의 요소와 본격문학을 접목해 직조한 서사의 힘이 준 가독성에서 온다. 영화를 보는 듯한 서사의 흐름 역시 독자에게 영상 미장센을 읽는 듯한 감각을 경험하게 해 또 다른 읽을거리다.
『그랑호텔의 투숙객들』은 마술적 리얼리즘 소설이다. 가상의 공간이자 실재일 수도 있는 ‘그랑호텔’이라는 공간에 인물들을 살게 해 생각하고 행동하고 다투게 했기 때문이다. 장르소설의 추리와 스릴러적 요소 그리고 본격문학이 갖는 깊이가 이메일 교환과 역사적 기록을 통한 사유로 이어진다. 역사적 사실도 있고 허구도 있다. 1906년 대한제국 청계천 무당의 영혼결혼식과 현재에 이르는 120여 년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774쪽이라는 서사는 긴 소설임에도 처음과 달리 길게 느껴지지 않는 게 이 때문인 듯하다. “인간 욕망이라는 주제의 진지함과 오랜 역사적 맥락을 거슬러 오른 서사의 복잡성을 퍼즐처럼 배치한 추리적 묘사를 통해 가독성을 높였다.”는 작가의 말이 빈말이 아니다. 덤으로 문장 곳곳에 들어있는 아포리즘은 이 소설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역사는 변하지만 욕망은 변하지 않는다
모든 물질은 소멸하지만, 누군가의 물질은 영원하다
소설 속에서는 두 개념이 대립한다. 어떻게 하면 인간은 물질 욕망의 덫으로부터 여전히 고귀한 존재로 살아갈 수 있을까? 누구나 영혼을 가지고 있다면, 영혼의 존재를 육체처럼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다면, 물질의 소유의 정도에 따른 차이와 차별 그리고 불평등은 사라지지 않을까. 영혼은 고귀하므로. 반대쪽에서도 영혼은 고귀하다. 다만 용도가 다르다. 영혼이 존재한다는 물증이 있다면 현세의 물질적 부를 내세로 가져가 소유의 불멸이 가능하다고 본다. ‘존재’인지 ‘소유’인지를 묻게 하는 이 질문은 ‘존재와 소유’의 에리히 프롬을 다시 고민하게 만든다.
세상의 모든 소유와 욕망과 불안은 사랑의 결핍으로부터 왔다
너의 고귀함은 영혼이 아니라 사랑의 힘이다
다소 진지할 수도 있는 이 소설이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사랑이다. 인간의 극단적 욕망과 불안이 모두 사랑의 결핍에서 온다고 보기 때문이다. 본문의 한 대목이다.
“그게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선생님?” 몰라서 묻는 게 아니라 답답해서 묻는 것 같았다.
“사랑이오.”
“…… 더 난해해지는데요, 선생님……?”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거요. 우리는 스스로 그랑호텔의 투숙객인지 아닌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그런 자신을 보려 한 적이 있는지, 이 자문과 성찰이 사랑이오.”
어느 시대의 어느 인간이든 욕망을 품고 펼치려 했듯, 어느 시대 누구든 결핍을 안고 살았다. 사랑이다. 사랑의 결핍이 오염된 욕망을 가능하게 했다. 소설의 한 대목이다.
…… 환상을 믿은 마지막 인간, 이과수는 불현듯 그가 보고 싶어졌다. 가만히 의자 뒤로 다가갔다. 등받이 너머에서 숨소리가 들렸다. “저 왔습니다, 지배인님……, 이 대리요.” 조용했다. 이과수는 의자 등받이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천천히 의자를 돌렸다.
이 대리와 지배인을 대비시킨 이 장면은 소설의 구도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욕망은 욕구와 달리 절제의 대상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그 윤리가 무너지면서 빚어진 비극이다.
인간의 욕망과 존재의 이중성과 부조리
그랑호텔 투숙객들의 욕망이며, 이 소설이 시작하는 지점이다
작가의 말이다.
“하여 나는 우리의 욕망이 어떤 역사를 써 왔는지, 어디로 우리의 욕망이 가고 있는지, 그 욕망의 저력에 대한 도덕성과 윤리를 ‘양심의 힘’으로 묻고 싶었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최후의 보루는 양심이다.”
소설의 걱정과 달리, 어차피 그랑호텔의 투숙객들은 자신들의 욕망이 추구한 물질적 부를 내세로 가져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욕망을 학습한 또 다른 그랑호텔의 투숙객들이 욕망을 사냥하기 위해 나설 것이라는 짐작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 예지몽이 타인과의 관계와 소통을 암울하게 만든다. 작가가 우려하는 지점이다. 작가는 극단적인 물질 만능주의를 종식할 대안으로 영혼이 아니라 사랑을 꼽는다. 사랑은 오랜 인류의 결핍이자 소망이기 때문이다. 『그랑호텔의 투숙객들』은 인간의 욕망과 존재의 이중성과 부조리를 사건과 사유를 통해 천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