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_열린 동아시아, 인문한국의 비전 제목의 배경
이 책의 제목 『열린 동아시아, 인문한국의 비전』은 사실 도발적인 면이 있다. 한국연구재단이 주관해온 ‘인문한국’ 사업을 저자들이 대변하겠다는 듯한 ‘오만함’이 살짝 묻어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제목은 2018년 3월부터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이 진행한 인문한국플러스(HK+) 사업의 과제명과 일치한다. 해당 과제명을 고스란히 책 제목으로 옮긴 이유는, 이 책에 2025년 2월로 종료되는 HK+사업 7년간의 연구성과를 종합하는 의미를 담았기 때문이다. 즉, 이 책은 ‘인문한국’이라는 고유명사와 함께 동아시아학술원이 수행해온 7년, 더 소급하자면 17년의 연구 활동을 매듭짓는 위치에 있다. 19명의 공동저자가 예외 없이 HK+연구인력으로만 구성되었다는 점도 강조하고자 한다.
지난 7년간 동아시아학술원은 「열린 동아시아, 인문한국의 비전」이라는 아젠다 아래 동아시아학이 의미하는 융복합 인문학의 국제적·사회적 효용성을 탐색하는 데 집중해왔다. 구체적으로는 젠더·민주주의·번역 등 기왕의 학술적 화두를 동아시아적 시각으로 확장하였을 뿐 아니라, 최근의 글로벌 이슈인 기후 및 환경문제, ‘생명’의 학제적 재인식 등을 새로운 동아시아학의 화두로 제기하기도 했다. 그 모든 걸음걸음을 이 총서 안에 전부 녹여낼 순 없었지만, 적어도 이 책이 ‘방법으로서의 열린 동아시아’가 펼쳐온 논제를 ‘미래가치’로 전환하는 본격적 출발점이 되리라는 점은 의심하지 않는다.
__‘열린 동아시아’란
『방법으로서의 열린 동아시아』(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22) 서문에서는 ‘열린 동아시아’의 정의와 의의에 대해 “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특정 시간이나 시대, 국가나 지역, 분과학문에 국한하지 않고 서로의 경계를 열어두고 접근한다는 인식론적 방법과 시각을 말한다”고 설명했는데, 이는 ‘열린 동아시아’의 개념과 지향점에 대한 가장 적절한 설명일 것이다. 이렇듯 ‘열린 동아시아’는 단순히 한국·중국·일본을 통합적으로 연구하는 수준을 넘어, 시공간과 학제를 넘나드는 방법이자 시각 그 자체로 고안된 용어이다. 여기에 인문학과 대중의 접점을 확대하고자 하는 문제의식 또한 겸비하고 있다. 물론 크게 열려 있기에 공허한 외침에 그칠 위험성도 존재한다.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분야에서 ‘동아시아’라는 키워드 자체가 이미 상용어처럼 되어버린 지금, 과연 ‘열린 동아시아’가 제시할 수 있는 새로운 지평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동아시아학술원 HK+사업단은 3대 핵심 연구영역을 설정하였다. 바로 「사회적 관계성」, 「난(亂)과 민주주의」, 「열린 지식과 표상」이다.
__이 책의 구성
○ 제1부 ‘동아시아 연구의 현재와 미래’ : ‘동아시아’를 내세운 논문을 위주로 구성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여기에 3대 연구영역, 연구 대상 시기, 그리고 전공별 다양성을 추가로 고려하였다. ‘동아시아’를 의식적으로 표방하는 만큼 제1부의 글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비교의 시각을 적용함으로써 동아시아적 현상에 주목하고 있다.
배항섭은 인류가 질병·기후·환경 등 전지구적 차원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지금, 동아시아사 연구 역시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그동안의 동아시아사 연구의 성취와 한계를 독자적 시각으로 재구성하였다. 박소현은 명청대 중국의 공안소설과 조선 후기 송사소설을 동아시아 범죄소설이라는 범주로 설정하였으며, 법문학비평의 관점에서 『와사옥안』을 분석하였다. 김용태는 조선의 문체반정, 청조의 문자옥, 일본의 이학금지를 ‘유학의 재구성’에 요청하는 시대적 흐름에 국가 권력이 개입한 동아시아 사상사 차원의 사건으로 바라보았다. 손성준은 『월남망국사』의 번역을 둘러싼 중국(저본)·한국(역본)·일본(검열)의 역학을 고찰하는 한편, 금서로 지정되어 회고의 대상에만 머물던 『월남망국사』가 해방기를 맞아 재역(再譯)되었으나 결국 냉전 질서 속으로 편입되어간 사정을 밝혔다. 임우경은 일본군이 운영했던 ‘위안소’가 일본의 패전 이후 한국과 대만 등 동아시아 각지로 연쇄되어 간 현상에 주목했다.
○ 제2부 ‘사회적 관계성’ : 주로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과 거기서 파생된 문제의 연원에 대해 탐색해왔다. 이번 책에서 김경호는 대표적 고전 『논어』와 『사기』의 사례를 들어 익히 알려진 전세문헌의 내용과 출토된 문헌 사이의 ‘차이’를 논하였다. 그는 고전의 텍스트성이 가변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로부터 고전에 대한 학제적 연구의 필요성을 도출한다. 고은미는 14세기의 원(元)이 조공 체제의 안과 밖에 위치하던 고려와 일본에 대하여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해상 교역을 맺었던 사실에 주목하여 관련 법령과의 연관성을 탐색하였다. 김영죽은 선비와 상인의 경계에 놓여 있던 조선 후기 역관(譯官)의 존재 양상을 고찰함으로써 ‘유상(儒商)’ 혹은 ‘사상(士商)’이라는 용어를 보다 확대 적용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박이진은 1980년대 이후 일본정부의 외국인 정책 변화와 맞물려 있던 혼혈 담론의 사회적 변동을 살폈다. 그는 혼혈의 다양성이 소거되는 맥락이 결국 일본인과 외국인의 구분이라는 이분법으로 수렴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장무후이는 최근 중국에서 출현한 ‘신질생산력(新質生産力)’의 개념과 특징을 소개하며, 그것이 미국ㆍ중국 무역 갈등의 맥락 속에서 채택된 ‘질’ 중심의 경제발전 전략이며 다양한 국제적, 사회적 문제 해결을 위한 전략을 내포하고 있음을 논하였다.
○ 제3부 ‘난과 민주주의’ : 주로 난민이나 혁명의 역사적 성격과 개념, 혐오의 문제 및 여성의 자기표현 등에 대해 다루어왔다. 이번 책에서 이평수는 태평천국의 난과 관련된 대표적 삽화인 남경득승도(南京得勝圖)가 기왕의 인식대로 청나라 군대에 의해 멸망하기 직전이 아니라 오히려 세력이 강성하던 1853년에 이미 제작되었음을 밝히며, 이로부터 태평천국을 둘러싼 중국의 허위 선전 및 서구 국가의 시선 등을 새롭게 분석하였다. 박은영은 19세기 일본의 보신(戊辰)전쟁에 참여한 여성 니지마 야에(新島八重)에 주목하여, 그동안의 여성사 연구의 이분법적 이해 방식(근세=억압, 근대=해방)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 구도에서 벗어난 아이즈번의 패자 야에의 경우, 오히려 근대가 차별과 억압의 시작일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김예진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기에 간행된 『월간 아메리카』의 미국소설을 미국의 문화외교 전략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미국 공보원과 국무성이 기획한 이 번역의 핵심이 결국 미국식 민주주의의 선전에 있었다는 것이 이 글의 핵심이다. 이혜령은 1975년 유엔이 주최한 세계여성대회에 한국 대표단으로 참석한 이효재의 시선을 추적한다. 특히 「멕시코 선언」을 둘러싼 냉전적 억압, 그리고 분단의 체험이 이효재가 진보적 좌파 페미니스트로 발돋움한 동력이었음을 밝힌다.
○ 제4부 ‘열린 지식과 표상’ : 4부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지식 및 사상의 이면에 있는 동아시아적 배경, 그리고 관련 텍스트 및 이미지의 재구성에 대해 주로 다루어왔다. 이번 책에서 이영호는 유학자들이 유학의 형성 초기부터 인간의 마음을 탐색해왔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현대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불안 및 불행을 극복할 단초 또한 결국 마음에서 찾아야 한다고 진단한다. 이른바 인심(人心)에서 도심(道心)으로의 전환이다. 임태승은 고문헌을 통해 ‘성균(成均)’이라는 단어에 내재한 진의(眞意)를 재구한다. ‘성’과 ‘균’은 모두 음악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며, 이는 다시 유가의 ‘시언지(詩言志)’ 전통과 연결된다. 이 점에 착안한 그는 오늘날의 대학에서도 육예(六藝) 교육을 병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고연희는 중국 문학과 중국 회화사에서 유래한 ‘피리 부는 목동’ 관련 이미지가 조선의 팔경시(八景詩) 속에 자리잡는 과정을 분석하였다. 나아가 이미지와 문예 작품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투영한다는 점을 논하였다. 진재교는 조선 후기에 명나라 문학가 왕세정(王世貞)의 글이 장기간에 걸쳐 논쟁적 방식으로 독해된 현상에 주목하여 ‘문예 공화국’이라는 개념을 도출하고 있다. 왕세정의 글 자체가 동아시아 문인들을 잇는 가교이자 가상의 소통 공간이었다는 것이다. 정우택은 이용악의 ‘북방 로컬리티’ 성격 변화를 살피며 그의 시 「오랑캐꽃」을 ‘오랑캐 - 되기’/‘비(非)국민 - 되기’를 통해 식민지 전시체제기에 대응한 작품으로서 자리매김하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