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더 건강해지고 있는가, 아니면 더 많이 통제당하고 있는가?”
의료는 과학인가, 윤리인가? 우리는 의료를 진보와 발전의 산물로 인식하지만, 의료가 항상 모든 이들에게 평등하게 다가간 것은 아니다. 의료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다고 믿고 싶지만, 그 이면에는 의료 제도의 사각지대에서 소외된 이들, 발전의 이름 아래 희생된 개인, 그리고 기술이 만들어낸 새로운 불평등이 존재한다.
19세기 상하이 조계 지역의 의료 행정을 검토해 보면, 서구 의료는 ‘위생’과 ‘공공보건’을 앞세워 도입되었지만, 이면에는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악용되는 측면이 강하다. 위생과 질병 통제의 명목으로 지역 원주민들은 밀려났고, 의료 시스템은 특정 계층을 중심으로 설계되었다. 또 현대 정신의학은 정신질환을 약물로 치료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어 많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이 과정에서 인간의 내면적 요소와 감정이 배제되었다.
한편 현대 사회에서 온라인 기반의 의료 정보가 확대되면서, 고령층과 디지털 접근성이 낮은 계층은 오히려 의료 서비스에서 배제되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첨단 의료 기술이 정말로 모두를 위한 것인가? 이 책은 이러한 문제 제기로부터 시작된다.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통합의료인문학연구단은 이러한 의료의 빛과 그림자를 탐구하면서 『인문학으로 비추어보는 의료 발전의 이면』을 출간했다. 의료 인문학이라는 독창적 접근을 통해, 이 책은 ‘좋은 의료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의료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을 제공한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의료는 더욱 인간적이어야 한다
이 책은 의료 발전의 명암을 탐색하며, 의료가 만들어낸 불평등과 굴절된 의료 현실을 두 개의 큰 주제로 나누어 분석한다.
1부는 〈의료의 그늘, 소외된 인간〉을 주제로 “현대 의료는 우리 모두를 구원하는가,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배제를 만들어내는가?”를 탐색한다.
김승래 교수의 〈조계의 의료와 ‘갑북’〉은 서구 의학이 19세기 상하이 조계 지역에서 어떻게 확산되었는지를 탐색한다. 19세기 말 서구 의료는 위생과 공공보건을 명분으로 도입되었지만, 실상은 식민지 통치를 강화하는 수단이었다. 위생을 구실로 특정 지역을 개발하고, 원주민들은 그 속에서 배제되는 구조가 반복되었다.
김태은 교수의 〈중국의학에서의 심(心) 수양과 현대 동서의학의 심리치료〉는 정신의학이 약물 중심으로 변모하면서 인간의 감정과 정신적 고통이 외면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전통 중국의학에서 강조되었던 ‘마음의 수양’은 현대 정신치료에서도 유효한 대안이 될 수 있을까?”를 묻는다.
정세권 교수의 〈1970년대 실내로 들어온 ‘공해’ 그리고 위생 가전의 등장〉은 공중보건이라는 명목 아래 어떻게 위생 가전 산업이 등장하고 소비의 논리가 의료와 결합했는지를 분석한다. 깨끗한 환경을 만들기 위한 기술이 역설적으로 위생의 개념을 소비재로 전용하는 과정으로 변질되었음을 보여준다.
조민하 교수의 〈정보 기술의 발달과 노인의 헬스 리터러시〉는 디지털 의료 기술이 고령층을 어떻게 배제하고 있는지를 다룬다. 병원 예약부터 건강관리까지 모든 것이 온라인화된 시대, “누군가는 클릭 한 번이면 해결되는 문제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의료 시스템 자체에서 밀려나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묻는다.
2부는 〈인간이라는 프리즘, 의료를 굴절시키다〉라는 주제로 “의료는 과학인가, 욕망인가?”를 묻는다.
박성호 교수의 〈광고를 통해 굴절된 근대 의료〉는 1910년대 신문 광고를 통해 의약품의 역사적 왜곡을 분석한다. 의료 광고는 의료 지식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중요한 창구였지만, 동시에 상업적 목적에 의해 과장되고 조작되었다. “질병에 대한 두려움을 자극하고, 만병통치약을 내세운 광고들은 당시 환자들에게 어떤 선택을 강요했는가?”를 묻는다.
이동규 교수의 〈식품과 건강에 대한 근대 지식의 성립과 한계〉는 현대 영양학이 어떻게 과학적 사실과 경제적 이해관계 사이에서 변형되었는지를 탐구한다. “우리를 건강하게 한다고 믿는 음식은 정말 건강을 위한 것일까, 아니면 산업적 필요에 의해 조작된 결과물일까?”를 묻는다.
조태구 교수의 〈의료 기술의 발전과 위협받는 생명〉은 유전자 기술과 태아 성감별 문제를 다룬다. “의료 기술이 인간의 생명을 존엄하게 하는가, 아니면 기술적 판단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가?”를 묻는다.
의료는 누구의 것이어야 하는가? 우리의 질문은 계속되어야 한다
『인문학으로 비추어보는 의료 발전의 이면』은 의료를 단순히 과학적 발전의 산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문화적·윤리적 관점에서 의료가 어떻게 변형되고 이용되는지를 탐구한다. 기술 발전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문제를 동반하며, 그 과정에서 의료는 인간성을 잃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의료를 기술과 과학의 문제로만 다룰 것이 아니라, “어떤 의료가 인간을 위한 의료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