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과 같이 견고해 능히 일체 번뇌를 끊어 없애는 진리의 말씀
《금강경(金剛經)》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유통되고 있는 경전으로 대장경(大藏經) 가운데 반야부(般若部)에 속해 있는 경이다. 대반야 600부 가운데 577권에 해당하는 경인데, 본 제목 《금강반야바라밀다경(金剛般若波羅蜜多經)》을 약칭해 《금강경》 혹은 《반야경》이라 부른다. 한역의 번역본에 따라서 ‘능단(能斷)’이나 ‘능할(能割)’ 또는 ‘불설(佛說)’ 등의 말이 붙어 있는 제목도 있다. 범어로 된 원래 제목은 《바즈라체디카 프라즈나 파라미타 수트라(Vajracchedika prajǹā pāramitā sūtra)》다. 지금까지 범본이 남아 있다. ‘금강과 같이 견고해 능히 일체 번뇌를 끊어 없애는 진리의 말씀’이라는 뜻이다. 옛날부터 중국에서 이 경을 판석(判釋)해 대승시교(大乘始敎)의 경이라고 했다. 이 말은 이 경이 대승의 법을 설하기 시작한 가르침이란 말이다.
선종의 필독서
불립 문자를 표방하는 선가에서도 중요하게 여겨 온 경으로 선행(禪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중국 선종의 5조 홍인(弘忍) 스님과 6조 혜능(惠能) 스님 이래로 선종에서도 필독서로 여겼다. 6조 스님은 이 경을 듣고 발심해서 출가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선종의 법맥을 계승한 조계종에서는 유독 이 경의 이름 하나만 종헌에 넣어 소의 경전으로 지목해 놓았다. 이 경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삼국 시대 초기였으며, 역사적으로 볼 때 불경 가운데서 가장 많이 독송되어 온 경이라 할 수 있다. 고려 시대 보조 국사가 불교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경의 독송을 널리 권장해 온 이후로 특히 많이 유통되었다. 이 경이 한역(漢譯)된 것에는 구마라습(鳩摩羅什, 343∼413), 보리유지(菩提流支), 진제(眞諦, 499∼569), 급다(笈多, ?∼619), 현장(玄奘, 602∼664), 의정(義淨, 635∼713)이 각각 번역한 여섯 가지가 있는데, 이 중 진나라 때(402) 구마라습이 번역한 본이 널리 유통되었다.
32분 18주 27단의
《금강경》의 경문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소명 태자의 32분 분류대로 전문을 나누었다. 〈법화인유분〉에서 〈응화비진분〉에 이르기까지 부처님과 수보리의 문답 형식의 대화로 전개되는데, 1분에서 16분까지가 전반이 되고 17분부터 32분까지가 후반이 된다. 이렇게 전·후반을 나누는 것은 수보리의 질문이 전반에 나온 것이 후반에 다시 나오므로 편의상 전후로 나누어 보는 것이다. 금강경 해석에는 4∼5세기 북인도 건타라국의 무착(無着, Asaṅga)과 그 아우 세친(世親, Vasubandu]이 각각 지은 두 《금강반야바라밀경론》이 표준이 되었는데 두 논의 특징을 살펴보면, 무착은 경 전문을 수행의 지위에 배대 18주를 세워 설명하고, 세친은 27단의를 세워 설명한다. 18주는 수행의 지위 점차를 따라 경문에서 설한 뜻을 연관 지어 수행의 지위, 곧 머무는 자리를 18가지로 나누어 말한 것이고, 27단의는 부처님과 수보리의 대화 속에 들어 있는 속뜻에 의심을 일으키고 끊어 주는 문답을 전개해 전문에 걸쳐 27번의 의심을 끊어 준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진정한 전문가가 쓴 책
《금강경》을 수십 년간 연구 강의해 온 전문가이자, 조계종 승가대학원장, 반야불교문화연구원 원장인 지안 스님이 우리말로 옮기고 풀어 설명한다. 서문을 쓴 호진 스님은 지안 스님만큼 《금강경》에 대해 이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고 독송한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겠느냐며, 《금강경 강해》는 학문적으로, 신앙적으로 진정한 전문가가 쓴 책이라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다고 추천했다. 《금강경》은 그다지 긴 경이 아니다. 짧게는 네 줄, 길게는 10여 줄씩의 길이로 모두 32단락으로 구분되어 있다. 지안 스님은 단락마다 쉽고 반듯하게 번역을 하고, 계속해서 ‘해설’란에서 자세하고도 친절하게 그 내용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것도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이야기’난을 두어 내용과 관계있는 경전, 논서, 설화, 일화 등을 동원했고, 초기 불교에서 대승 불교, 선불교, 한국 불교를 넘나들면서 해박하고도 재미있게 설명했다. 읽다 보면 깊고 어렵고 딱딱한 내용들이 어느 결에 이해가 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