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일제하 전라남도의 완도군, 진도군, 무안군(현 신안군)의 여러 섬에서 일어난 항일민족운동과 농민운동, 청년운동 등에 대해 정리한 책이다. 일제하 도서지역에서는 우리의 선입견과는 달리 항일 민족운동과 농민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부에서는 완도군의 소안도, 완도 본도, 고금도, 조약도, 신지도 등에서의 항일민족운동과 사회운동, 그리고 진도에서의 항일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을 다루고 있다. 완도군과 진도군에서는 소안도에서 항일운동이 가장 활발했기 때문에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소안도 주민들은 1920년대에 수의위친계, 일심단, 배달청년회, 노농대성회, 살자회 등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그 결과 수십 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는데, 이 작은 섬에서 그렇게 항일운동이 치열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송내호를 비롯한 소안도 민족주의자들의 뛰어난 지도력을 우선적으로 꼽고 있다. 송내호는 소안도 출신으로 서울에서 공부했으며, 1927년 신간회가 출범했을 때 본부에서 상무간사를 맡을 정도로 활동력이 뛰어났다. 저자는 또 소안학교에서의 민족교육, 토지회수투쟁을 통한 주민들간의 단결도 강력한 소안도 항일운동의 배경으로 들고 있다.
소안도 외에도 완도군의 완도 본섬, 고금도, 조약도, 신지도, 그리고 진도에서 일어난 각종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을 꼼꼼하게 정리하고 있으며, 특히 이 운동에 참여한 인물들의 인적 사항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특히 1930년대 완도군, 해남군, 진도군 등에서 일어난 이른바 적색농민조합 사건들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있어, 이 시기 타 지역의 적색농민운동과 비교가 된다.
2부에서는 오늘날의 신안군 지역에서 일어난 소작쟁의와 농지탈환운동 등 농민운동을 주로 다루고 있다. 1920년대 암태도를 비롯하여 지도, 자은도, 도초도, 매화도 등에서 소작료 4할을 주장하는 소작쟁의가 연이어 일어났고, 도민들의 단합된 끈질긴 투쟁으로 이 지역에서의 소작쟁의는 연일 신문에 보도되어 전국적으로 주목을 끌었다. 이 섬들에서의 소작쟁의로 인하여 각 섬마다 수십 명이 투옥되는 사태를 겪었지만, 암태도와 지도에서는 소작료 4할을 관철시켰다. 이 섬들에서의 단결력, 투쟁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이었을까. 저자는 역시 소작쟁의 지도자들의 지도력, 청년회와 부녀회 등 주민들의 단체, 마을별로 조직된 을축동맹이나 농민단 등이 그 투쟁력의 원천이었다고 보고 있다. 저자는 잘 알려진 암태도 소작쟁의 외에도 인근의 지도, 자은도, 도초도, 매화도에서 일어난 소작쟁의를 서로 비교하면서 잘 정리하고 있다.
하의도에서의 농민운동은 소작쟁의가 아니라 이른바 ‘농지탈환운동’이었다. 하의도의 농지 20결이 인조 초년에 정명공주방에 절수되었는데, 정명공주의 시가인 풍산 홍씨가에서는 훗날 하의도 농지 전체, 그것도 세금을 거둘 수 있는 수조권이 아니라 소유권을 하사받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하의도 농민들은 본래 20결의 수조권만 절수되었다면서, 풍산 홍씨가에 맞서 싸웠지만, 홍봉한 등 홍씨가의 세도에 눌려 20세기 초까지 이 땅의 소유권을 되찾지 못했다. 통감부 시기 하의도 농민들은 재판을 시작하였는데, 홍씨가에서는 재판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이 땅을 제3자에게 팔아버렸고, 결국 일본인 도쿠다 야시치에게 넘어갔다. 이후 하의도 농민들은 도쿠다를 상대로 농지탈환운동을 벌여야만 했는데, 일제 말기까지 땅을 되찾지 못했다. 해방 이후 이 땅은 다시 미군정의 신한공사로 넘어가 하의도민들은 땅을 되찾지 못하였고, 소작료를 강제로 받으러 온 신한공사 직원들에 대항하다가 큰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7.7폭동). 결국 한국전쟁 이후에야 국회에서 이 땅을 헐값에 하의도 주민들에게 불하하기로 결정하여, 하의도민들은 자기 땅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리하여 330여 년에 걸친 하의도민들의 투쟁은 끝이 났다. 저자는 조선후기부터 1950년대에 이르는 긴 세월 하의도 땅에 얽힌 역사를 꼼꼼하게 풀어나가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의 말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무려 330여 년 동안 하의도민들이 겪은 수난과 저항의 역사는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하의도민의 수난과 저항의 역사는 이 땅의 민중이 겪은 수난과 저항의 역사를 대변하며,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꾸준히 전진해 온 이 땅의 역사를 대변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