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 스스로 ‘가장 큰 공’이라 평가한 싸움, ’부산대첩’
“부산대첩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나라도 없었을 것!”
임진왜란이 터진 1592년, 이순신 함대는 옥포·당포·한산·부산의 왜적을 휩쓴 네 차례 승첩에서 10번 접전을 펼쳐 모두 크게 이겼다. 옥포승첩의 3회 접전(옥포·합포·적진포)에서는 적함 42척을 깼다. 아군 피해는 부상 1명. 한산대첩에서는 적선 79척 가운데 59척을 깼다. 죽은 왜적 수는 9,000여 명. 왜군 장수도 수십 명 죽고 마나베 사바노조는 할복했다. 그러나 조선 수군 피해는 한산과 안골 해전을 합쳐도 전사 19명, 전상 115명뿐이었다. 부산포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전선 470여 척 가운데 100여 척(이순신 장군의 장계)을 격파하는 최대 전과를 올렸다. 아군 피해는 전사 6명, 전상 25명. 그래서 이순신 장군 스스로도 장계에서 “힘써 싸운 공로는 먼저보다 훨씬 더합니다”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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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전후 네 차례 출전하여 열 번 접전을 하고 모두 승첩을 이뤘으나, 만약 장수와 군졸들의 공로를 논한다면 이번의 부산전투를 넘지는 못할 것입니다.
전번에 싸울 때에는 적선의 수가 불과 70여 척이었습니다만 이번은 큰 적의 소굴에 늘어서서 정박하고 있는 400여 척 속으로 군사의 위세를 떨치고 승기를 타고 돌진하였습니다.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꺾이지 않고 하루 종일 분한 마음으로 공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깨뜨려 부수고, 적들로 하여금 마음이 꺾여 가슴이 무너지고 머리를 움츠리고 두려워서 떨게 하였는바, 비록 머리를 베지는 못하였으나 힘써 싸운 공로는 먼저보다 훨씬 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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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9월 당시 부산포는 완전한 적의 본거지였다. 적선은 거의 500척, 병력은 6~7만 명. 판옥선 74척(협선 등을 합쳐 166척)인 이순신 함대가 밀고 들어갔다가 혹여라도 퇴로가 막히면 아군은 전멸이다. 상상해 보자. 적의 최고 사령부가 있는 본거지로 과감하게 쳐들어가 마구 쳐부수고 질서 있게 돌아가는 조선 함대를. 열세의 전력으로 삼엄한 적의 심장부를 타격하겠다는 담대한 발상은 이순신 장군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일을 현실로 만든 전투가 바로 ‘부산대첩’이었으니, 이 통쾌한 승리는 왜적의 수륙병진 전략을 파탄시켜 임진 7년 전쟁 승리의 밑거름이 되었다. 한마디로 ‘부산대첩이 없었다면 오늘날 이 나라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부산대첩의 성과는 재평가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처럼 부산대첩은 우리 국민 누구에게나 잘 알려져서 이를 기리고 노래해야 할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이 거룩한 역사를 부산 북항 바다에 묻어 두고 있다가 최근에 와서야 수면 위로 건져 올리게 되었다.
‘부산대첩’이라는 단어의 기원은 대첩의 주인공인 이순신 스스로가 한 말에 연유되었고, 최근에는 부산시의회에서 제정한 「부산대첩 기념사업 지원 조례」에서 공문화됨으로써 부산대첩은 공적으로 확인되었다. 뜻있는 부산 시민들에 의해 2018년 ‘(사)부산대첩기념사업회’가 조직되어 열심히 부산대첩을 홍보하고 있으나 6년이 지나도록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희곡과 시나리오가 쓰여 연극과 영화가 만들어지고, 장대한 승리의 역사가 가곡과 오페라로 노래되며, 동화로 어린이들과 만나고, 소설로 세상에 널리 퍼져 나가고, 통쾌한 승리가 그림으로 그려지고, 시로 낭송되고, 드라마로 방영되어 부산대첩의 역사가 이 세상에 널리 퍼져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