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진 적이 없는 모든 것들
〈창세기〉가 기록된 이후 〈창세기〉와 관련된 책들은 얼마나 많이 나왔을까? 설교는 얼마나 많았고, 글은 얼마나 많이 쓰였을까?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전 1:9) 했거니와, 이미 언급된 것만으로도 새로운 것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런 마음을 조심스레 다스리며 책을 펼쳤다.
이 책이 〈말/숨/삶〉 시리즈 중의 하나이고, 이 시리즈가 주석과 큐티의 중간에 위치해 있어 정해진 본문의 ‘해설’은 성서신학자가 학문적인 연구를 소화한 바탕에서 제공하는 최소한의 정보이며, 이어지는 ‘묵상’은 그날의 본문 안에 담긴 여러 주제 중 하나를 택하여 오늘의 삶에 적용한 묵상이라는 편집자의 소개가 새로운 표지판처럼 다가온다.
이 책이 갖는 미덕 중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창세기〉의 본문 모두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난해하거나 무의미해 보이면 외면하기 쉽다. 그런 점에서 모든 본문을 다룬 것은 성실을 넘어서는 배려라 여겨진다.
성실과 배려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최소한의 정보라 밝힌 ‘해설’에는 성서학자로서 흘려온 평생의 땀이 배어 있다. 그것은 단순한 지식을 넘어서는 것으로서, 마치 숨겨진 의미 하나를 찾기 위해서 돌산을 깨뜨리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수천 년의 시차를 두고 각기 다른 사람에 의해 쓰인 성경의 첫 책 창세기와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을 ‘수미상관법’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도 그렇고, 증폭되는 인간의 죄를 보고 슬퍼하고 탄식하는 하나님의 후회를 하나님의 실수가 아닌 인간의 타락성을 강조하는 반어법으로 이해하는 것도 그렇고, 다시는 땅을 저주하지 않기로 하시는 하나님의 다짐을 두고 언어가 가진 한계로 이해하는 것도 그랬다.
“알지 못할 것을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좋지만 자기 생각을 유일한 해석으로 고집하는 일은 매우 위험하다.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알지 못할 것을 신비로 남겨 두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경의 의미를 모두 정확히 알아내려는 노력은 인간의 본분을 넘어서는 교만이라 할 수 있다.”는 고백은 저자가 전해주는 자료와 그 자료를 대하는 태도를 더욱 신뢰하게 한다.
그런가 하면 삶에 적용하는 ‘묵상’은 자칫 앎에 머무르려는 시선과 걸음을 삶으로 돌리게 한다. 우리말 ‘뿔’과 ‘뿌리’가 한 어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자칫 무미건조해질 수 있는 자료에 따뜻한 체온을 불어넣는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여러 약자의 모습에서 오늘 동시대에 존재하는 수많은 약자를 떠올리는 것은 눈물겨울 만큼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 신뢰 때문일 것이다. ‘일 것입니다’로 끝나야 하지 않을까 싶은 문장이 ‘입니다’로 끝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어느새 저자와 함께 본문의 현장에 서 있다고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내내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 이야기에 목이 말랐던 어린 시절, 목마름을 채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 교회였다. 주일 오후나 수요일 오후 예배 시간, 선생님이 들려주던 성경 연속 동화는 다음 한 주를 기다림 속에 살게 했다. 그런 설렘을 가지고 다음 본문을 기대하곤 했으니,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렘이었다.
이따금 꺼내 보는 릴케의 〈기도시집〉에 “내가 믿는 것은 말해진 적이 없는 모든 것입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지금까지 나온 〈창세기〉에 관한 책과 말과 글이 산처럼 많아도, 〈창세기〉로 가는 아주 좋은 오솔길을 걸었다는 느낌이 책을 덮는 순간 마음을 채운다. 이런 마음 함께 누렸으면, 고마운 마음으로 책을 권한다.
_ 한희철 목사(정릉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