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회화 글쓰기 총서〉 제1권에 관하여
〈여성회화 글쓰기 총서〉는 여성, 회화, 그리고 글쓰기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번역 프로젝트다. 여성이자 이주자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회화 작업을 이어온 조은정(이하 제니조)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제1권으로 1958년생 여성 미술가이자 작가, 시인, 퍼포머인 유타 쾨터(Jutta Koether)의 소설(Novella) 『에프(f.)』를 소개한다. 쾨터의 글 『에프』는 “예술을 만드는 것과 예술이 만들어낸 것(the things that make art and the things that art makes)”이라는 주제를 벨벳, 꽃, 산호 목걸이, 오렌지, 돈, 립스틱 등의 모티프로 경유한다.
회화를 회화로 만드는 것, 예술을 예술로 만드는 것, 여성을 여성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회화를 그리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회화로 무엇을 만들고자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과 함께 쾨터의 회화를 들여다본다. 1987년 독일어로 처음 출간된 『에프』는 쾨터 자신의 이야기와 겹쳐진다. 빨간색 회화, 영어 화자가 아닌 채로 영어를 사용한다는 것, 펑크 문화에 대한 애호까지. 하지만 『에프』에서는 ‘벤웨이 부인’이라 이름 붙은 이인화된 화자가 글쓰기에 참여하며 작가의 자리를 다양화하고, 글쓰기는 이곳저곳으로 연결되었다가 단절되었다가 미끄러졌다가 하며 끝없이 탈중심화된다. 자전적 글쓰기와 허구적 글쓰기가 뒤섞인 『에프』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여기서는 오인만이 가능한 것처럼 느껴진다. 다만 이러한 오인이야말로 『에프』로 다가가는 방법 중 하나일 테다. 쾨터는 2016년 벤자민 H. D. 부클로(Benjamin H. D. Buchloh)와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은 이해보다는 오인이 갖는 잠재성에 관심이 있다고 말한 적 있다. 『에프』는 오인의 무한한 잠재성으로 읽는 이를 끌어들이며, 글쓰기 혹은 “예술을 만드는 것과 예술이 만들어낸 것”이 단일한 역사와 목적론적인 종착지를 향하는 게 아닌, 과정 속에서 계속하여 탈구축되는 무엇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때 『에프』는 회화와 퍼포먼스라는 쾨터의 이중적 실천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내는 서지사항이기도 하다.
〈여성회화 글쓰기 총서〉는 추후 회화로 작업하고 있는 작가 및 이론가, 연구자들의 독창적인 관점을 담은 글들을 한국어와 영어로 소개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점점 더 복잡해지는 동시대 미술 안에서 회화의 의미를 사유하는 담론의 장을 열어가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