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란트는 호메로스라도 따르지 못할 글솜씨를 가졌다. 그는 우리 시대의 단테다.”
- 야콥 로허 ㆍ 『바보들의 배』 라틴어판 번역자
★“브란트는 독일 시의 새로운 입법자다.”
- 울리히 폰 후텐 ㆍ 16세기 독일의 인문주의자, 시인
★“『바보들의 배』는 신성한 사티로스극(희극)이다.”
- 요하네스 트리테미우스 ㆍ 15~16세기 독일의 수도사, 암호학자
중세 사회의 정치ㆍ종교ㆍ문화를 통렬히 풍자하다
우인문학의 길을 연 제바스티안 브란트의 역작 『바보들의 배』
풍자가 지닌 힘은 일찍이 뛰어난 문필가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부터 로마의 유명 시인 호라티우스,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와 볼테르, 근현대 문학을 이끈 찰스 디킨스, 오스카 와일드, 조지 오웰 등 풍자를 통해 목소리를 내온 이들이 적지 않다. “진정으로 통찰력 있는 사람은 결코 심각하지 않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풍자는 인간과 사회를 통찰하는 강력한 수단이자 참된 삶의 의미를 반추하는 열쇠로 기능한다.
15세기 말 독일 인문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문인인 제바스티안 브란트는 이런 흐름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다. 중세 말기의 최대 걸작이자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그의 『바보들의 배』(1494년)는 ‘우인문학(愚人文學)’이라는 사조를 낳으며, 중세 사회를 새로운 사회로 이끈 종교개혁 및 르네상스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15~17세기 유럽에서 바보나 어릿광대를 내세워 사회 현실을 우화적으로 비판한 우인문학은 사회의 어두운 인간상을 고발하는 문제작이면서, 동시에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가벼운 웃음으로 소화하는 매력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인문학의 이런 대담성과 골계미에 더해 고대 문헌의 폭넓은 인용과 날카로운 해석까지 담은 브란트의 『바보들의 배』는 당대 최고의 인문 교양서로서도 큰 역할을 하며 다양한 언어로 번역돼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초판이 출간된 해에만 3쇄를 찍고, 브란트가 사망하기 전까지 17판이 나왔다는 사실에 비춰봐도, 브란트의 『바보들의 배』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격동기 유럽에서 새로운 길을 연 작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망망대해로 나서는 세상 온갖 바보들을 실은 배
‘과거의 바보’를 거울삼아 ‘현재의 나’를 돌아보는 성찰이 시작된다
배의 선장인 브란트가 태우는 승객들 중 바보가 아닌 이는 없다. 책을 읽진 않고 모으기만 하는 자, 헛된 부에 탐닉하는 자, 빌리기만 하고 갚지 않는 자, 할 일을 내일로 미루며 변화하지 않는 자, 자신을 최고라 믿는 맹목적 자만에 빠진 자, 밤거리를 돌며 혼란을 일으키는 자 등 세상 온갖 어리석은 자들의 천태만상이 책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 배의 선장이기도 한 브란트는 자신의 어리석음마저 고백하며 바보들을 비웃고 조롱한다.
“한때 나도 많은 어리석음의 인도자였고, 그것이 이제 내 마음을 괴롭힌다. 내가 이 배의 선장이 된 이상, 내 지난 과오도 꾸짖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말들이 어떤 이에게는 불쾌할 것이고, 자신이 잘못한 줄 아는 이들은 화를 낼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화를 낸다면, 내 소매를 잡고 나를 끌어가게 해라. 그들이 바보 모자를 쓴다면, 나는 어릿광대 모자를 쓰겠다.…나는 너희를 이 배의 밧줄 끝에 매달아 교육하고 싶지만, 그대들이 스스로 물에 빠져 죽을까 두렵다.”
- ‘스물일곱 번째 바보 이야기’ 중에서
브란트가 자신을 비롯한 바보들의 모습을 비웃고 조롱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그들의 어리석음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참된 삶의 모습과 그에 필요한 덕목을 되새기자는 것이다. 아주 먼 과거의 이야기 같지만,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놀랄 수 있다. 우스꽝스러운 바보들을 비웃고 조롱하는 사이 조용한 성찰이 시작될 것이다. 이 배에 오를 것인가, 아니면 부두에 남을 것인가. 아니면 나는 이미 이 배에 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 군상의 온갖 어리석음을 유쾌하면서도 냉소적으로 그린 브란트의 시선을 통해 현재 나의 모습과 참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덕목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오랜 세월 사랑받아 온 바보 이야기의 힘
중세 문학의 문턱을 낮춘 쉬운 번역과 친절한 구성
『바보들의 배』가 전하는 웃기지만 뼈아픈 삶의 메시지
미셸 푸코도 『광기의 역사』에서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있어 온 바보들의 무리, 그들의 축제, 그들의 집회, 그들의 이야기에서 새롭고 아주 강렬한 즐거움을 느낀다”라고 분석한 바 있다. 물론 이런 인간의 심리를 어느 한 가지 감정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차적으로 우스꽝스러운 바보들의 모습이 웃음을 자아낸다는 점에서 즐거움을 줄 수 있고, 바보들의 행태를 보면서 일종의 우월감 내지 안도감을 느낄 수도 있다. ‘나는 저렇게 어리석지 않다’, ‘나는 비교적 올바른 삶을 살고 있다’ 같은 감정을 느끼면서 말이다. 또 한편으론 사회적으로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덕목을 교묘히 어기는 자가 겪는 고초를 보면서, 역으로 이런 덕목을 잘 지킴에도 무시당하는 자들의 불행을 보면서 지금까지 당연시했던 사회 규범과 윤리, 도덕을 돌아보고, 변화시켜야 할 사회 부조리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기도 한다. 단순한 즐거움을 넘어 인간의 다양한 심리적ㆍ사회적 욕구를 충족하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간의 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가 오랜 세월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브란트는 무거운 시인이 아니다. 그의 『바보들의 배』는 오래된 독일 전투나 프랑스 기사들 대신에 당대의 사건과 살아 있는 사람들을 다룬 최초의 인쇄된 책이다. 그들은 때때로 약간의 따끔함을 느끼지만, 결국 책을 덮고 자신이 바보들과 같지 않음에 감사함을 느낄 것이다.”
-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 ㆍ 『독일인의 사랑』 저자, 19세기 독일 철학자, 동양학자
구텐베르크 출판사에서 이번에 펴낸 『바보들의 배』는 영국 성공회의 성직자 겸 시인이었던 알렉산더 바클레이가 펴낸 영역판(The Ship of Fools)을 번역한 것으로, 총 112가지의 바보 이야기 중 60가지 이야기를 담았다. 무엇보다 독자의 중세 문학에 대한 접근을 수월하게 하고자 원문의 운문형 문투를 산문형으로 바꾸었고, 편집자 주를 통해 생경한 인물이나 지역, 부연 설명이 필요한 역사적 사건이나 고대 문학 속 이야기 등을 풀이했다. 글에 어두운 이들조차 책의 메시지를 바로 알 수 있도록 브란트가 삽입한 목판화도 함께 실었는데, 바보들의 모습을 실감 나게 표현한 이 삽화들이 독자에게 읽는 재미를 더할 것이다. 유럽 지성사에 한 획을 그은 제바스티안 브란트의 『바보들의 배』를 통해 웃기지만 뼈아픈 바보 이야기가 지닌 힘을, 우인문학이 전하는 통렬한 풍자의 힘을 제대로 느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