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읽을 수 있고, 모두가 갖고 싶은 고전을 위하여
다이제스트를 뛰어넘는 진짜 컴패니언북의 탄생
“고전이란 모두가 권하지만 누구도 읽지 않는 책”이라는 마크 트웨인의 자조 섞인 명언이 유명하다. 그런 이유로 고전을 소개하는 많은 교양 입문서들은 누구도 제대로 읽지 않았지만 대체로 모두가 한번쯤은 읽은 듯 착각이 들도록 단순히 스토리를 소개하거나 주인공의 눈부신 활약을 서술하는 데 머무른다. 때로 각각의 고전 작품이 갖는 의미를 과대평가하면서 우리들은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거나 삶의 진리는 이러저러하다는 식으로 오버하는데, 가이드북이나 다이제스트를 표방하는 일반 대중교양서들이 흔히 취하는 태도이다.
반면 이 책 《브런치 인문학》에서는 고전이라는 작품들이 지혜나 교훈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을뿐더러 기껏 주인공이 굉장히 마음에 들어서 이 사람처럼 살고 싶다거나 그들처럼 행동하고 싶다 정도이지 직접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게 좋다는 식의 지침은 나오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애당초 고전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기에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교훈을 찾기보다는 은근히 즐거움만 얻으라고 권하다. 사실 그 즐거움이 배움과 연관이 있으며 많은 사람이 고전을 읽고서 흥미와 재미를 느끼는 것도 거기서 뭔가 배우는 점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재미와 흥미를 위해 각 작품의 스토리나 주인공의 이야기를 소소하게 들려주기는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 이야기(서사) 구조나 형식 등 전문성을 담보한 깊이 있는 해설로 어느새 독자들을 안내한다.
이처럼 이 책은 서양고전학 분야에서는 우리나라 최고 권위자로 평가받는 저자가 브런치 카페에서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아니면 흡사 브런치 메뉴를 개발해 독자들이 인문학을 부담 없이 소화할 수 있도록 그리스 로마 시대를 대표하는 서양 고전들의 레시피를 미슐랭 스타 셰프처럼 쉽지만 깊이 있게 소개한다. 인류 문명이 아직은 원시적이었던 기원전 8세기경 글자가 없어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며 인류 최초의 문학을 더듬더듬 모색하던 시절 발아한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부터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로 대표되는 그리스 비극까지 여러 영웅들의 장대한 서사 중 무엇 하나 버릴 것 없는 재료를 싹쓸이해 마스터 셰프가 껄끄럽고 부담스러운 파인다이닝보다는 깔끔하고 담백하면서도 풍미가 깊은 브런치 메뉴의 끝판왕을 선보이듯 진정한 의미의 컴패니언북을 독자들께 선보인다.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넘어서는 청동기시대 영웅들의 서사시부터
운명 앞에서도 다시 일어서는 존엄한 인간의 노래 그리스 비극까지
이 책은 코로나 전염병이 창궐하던 2022년 상반기부터 2023년 상반기까지 크게 세 시즌으로 경남대 교양교육연구소와 양재도서관이 공동으로 진행했던 ‘브런치 인문학’ 강의를 책의 형태로 다시 정리한 결과물이다. 강의에서는 각 시즌마다 네 작품씩 다루었기에 이 책도 그 순서를 따랐다.
첫 시즌에서는 서양에서 가장 유명한 서사시 세 편과 가장 유명한 비극 한 편을 다루었다. 트로이아 전쟁 중에 아킬레우스의 분노 사건을 다룬 〈일리아스〉, 전쟁 영웅의 귀향과 모험을 다룬 〈오뒷세이아〉, 로마 건국 서사시인 〈아이네이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혹한 운명 앞에서 인간의 의지와 존엄성을 보여준 〈오이디푸스 왕〉이다. 그중 세 편의 서사시에 대해서는 형식을 강조했다. 〈일리아스〉의 되돌이 구성과 날짜별 균형, 〈오뒷세이아〉의 아들 이야기와 아버지 이야기의 대칭성과 세 가지 주제의 균형, 〈아이네이스〉의 양분 구성 등이 그 사례이다. 비극인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관점을 약간 달리하여 이야기 진행의 필연성과 인물의 탁월함을 강조했다.
둘째 시즌에서는 희랍 3대 비극작가의 작품이 모두 포함되게 기획했다. 아이스퀼로스의 〈테바이를 공격하는 일곱 영웅〉,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에우리피데스의 〈힙폴뤼토스〉와 〈알케스티스〉를 다루었다. 〈테바이를 공격하는 일곱 영웅〉과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이 서로 싸워서 동시에 죽은 사건과 그 뒷이야기를, 〈힙폴뤼토스〉는 테세우스가 노경에 겪는 재난이 내용을, 〈알케스티스〉는 헤라클레스의 열두 가지 위업에 딸린 이야기를 다룬다. 아이스퀼로스는 운명의 힘과 인간의 선택 문제를 자주 다루는데 〈테바이를 공격하는 일곱 영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소포클레스는 주로 개인의 결단을 강조하는데 〈안티고네〉에서도 실정법과 자연법의 사이에 선 인간의 결단을 보여주며, 다른 한편 인간 이성의 한계를 탐색한다. 〈힙폴뤼토스〉에서는 인물 사이의 의사소통(또는 소통 불가능성)에 주의하면서 보면 좋다. 앞뒤에 등장하는 신들과 더불어, 인물들의 오고감으로 이루는 구조도 매우 뛰어나다. 〈알케스티스〉는 죽음이라는 무거운 문제를 희극적 인물 헤라클레스를 등장시킴으로써 가볍게 풀어내는데, 아이러니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셋째 시즌에서 다룬 작품은 아이스퀼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소포클레스의 〈아이아스〉, 에우리피데스의 〈헬레네〉와 〈박코스의 여신도들〉이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과 기술을 전해준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의 폭압에 저항하다가 절벽에 묶이는 얘기를 다룬다. 그의 수난은 제우스에 의해 소로 변해 온 세상을 떠도는 이오 이야기와 얽혀서 구조적 평행성을 보이며 작품에 담긴 여러 지리정보는 이 세계에 대한 전체상을 제시한다. 〈아이아스〉는 소포클레스 초기 작품의 특성대로 양분구성을 보이며, 위대한 인물이 실책으로 추락했을 때 그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의 문제를 제기한다. 에우리피데스의 〈헬레네〉는 전쟁이란 허상과 ‘전쟁 영웅’의 천박함을 폭로하면서 해피엔딩으로 희랍 비극에 대한 일반적 인상을 뒤엎어버린다. 〈박코스의 여신도들〉은 평생 신화와 신들을 비웃었던 에우리피데스가 종교현상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보여주는데 인간의 숨겨진 욕망이 일순 돌출하고 좌절하는 과정을 통해 거의 현대 심리학의 이론을 선취하고 있는 듯하다.
각 장 끝에는 강의 중에 있었던 질문과 답변을 “브런치 디저트”라는 형식으로 덧붙여 놓았다. 그리고 이 책이 강의 기록인 만큼 문장들이 입말 투(구어체)로 되어 있다. 아무래도 입말이 글말보다는 이해하기도 쉽고 친근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아울러 읽는 데 도움을 주고 보는 즐거움을 더하기 위해 회화, 건축, 석상, 지도, 도기와 토기, 영화 포스터 등 160여 점에 이르는 이미지 자료를 수록했다.
아무쪼록 그동안 옛 책(고전)을 어렵게 여기던 독자들이 이 책 《브런치 인문학》을 통해 비교적 쉽게 고전에 다가가 교양인의 길로 들어설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