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과 아티스트, 친구와 적, 슬픔과 기쁨……
세상 모든 경계를 무너뜨리는 포옹
정은혜 작가는 생후 3개월에 다운증후군 진단을 받았다. 장애인 친구들과 학교를 다니고 졸업했지만 20대의 은혜씨는 더이상 갈 곳이 없었다. 방구석에서 혼자 뜨개질을 하고 이불을 덮고 웅크리고 있던 암울하고 갑갑했던 시절, 작가는 책에서 이때를 ‘동굴’ 속에 살던 때로 묘사한다. 그러다 화가인 엄마 장차현실의 화실에 청소와 뒷정리를 도우러 나갔다가 직접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은혜씨의 삶에 온갖 색채와 사람에 대한 사랑이 햇살처럼 쏟아져들어왔다.
동굴 시절을 지나 은혜씨가 처음 끌어안은 사람은 바로 ‘문호리 리버마켓’의 감독님이다. 은혜씨는 이 문호리 리버마켓에서 ‘니얼굴 은혜씨’라는 간판을 내걸고 지금까지 무려 4천여 명의 캐리커처를 그렸다. 처음에는 비율과 표정이 독특한 은혜씨의 그림을 보고 “못생겼어요! 다시 그려주세요! 환불해주세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그러나 은혜씨는 엉덩이에 종기가 나고 아무리 춥고 더워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며 계속해서 사람들의 얼굴을 그렸다. 은혜씨가 그린 여러 개성 넘치는 얼굴들이 책장 가득 흘러가는 가운데, 은혜씨가 예술가로서의 단단한 정체성과 자부심이 담긴 말들을 무심히 털어놓은 대목들이 감탄스럽다.
“여름에 문호리에서 그림 그릴 때는 바가지에 얼음물 담아서 발을 담그고 있었어요.
엉덩이에 종기도 나요. 그래도 아무리 춥고 더워도 가기 싫은 날은 없어요, 전혀.
문호리에서 그림을 그려야 하니까. 그것이 내게 중요해요.”
“내 그림엔 실수 없어요. 틀린 적 없어요.
네, 실수란 없는 거예요.”
“나의 가장 큰 용기는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힘들어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쉬어가면서 할 거예요.”
“같이 웃어. 울지 말고, 울보야.”
발달장애인 투쟁을 위해 삭발한 뒤의 엄마를 그리다
정은혜 작가가 오랫동안 끌어안고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 가운데 가족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책에는 정은혜 작가가 가족들의 그림과 함께 기록한 가족사가 뭉클하게 기록되어 있다. 정은혜 작가가 그린 그림 속에서 엄마 장차현실은 남자처럼 짧은 더벅머리로, 웃는 듯 우는 듯 입을 조금 벌리고 비스듬히 서 있다. 만화가, 동양화가인 동시에 ‘한국장애인부모연대 양평지회장’을 맡고 있는 엄마 장차현실은 발달장애인 투쟁을 위해 삭발을 했다. 그런 엄마의 그림 옆에 정은혜 작가는 쓴다.
“엄마는 저를 오랫동안 키우느라 지쳤죠.
엄마가 많이 웃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엄마는 너무 걱정이 많고 우울해.
하지 마. 같이 웃어. 울지 말고, 울보야.”
책장을 넘기면, 울보 엄마 옆에 한 남자가 나타난다. 은혜씨가 열다섯 살 소녀였던 무렵 엄마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 장차현실 작가보다 일곱 살 연하의 서동일 감독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은혜씨의 동생 은백이 태어나고 마침내 두 사람은 결혼한다. 이 독특한 가족은 ‘결혼식’이 아닌 ‘가족식’을 올리고 한 가족이 되었다. 은혜씨는 원래 서동일 감독을 ‘오빠’라고 불렀는데, 가족식에서 이렇게 ‘축사’를 했다고 한다.
“오빠는 이제 다 컸으니까 아빠 해도 돼.”
그리고 이 가족을 신기하게 보거나, 편견을 갖고 바라볼 그 누군가에게 보란듯이, 책에 이렇게 썼다.
“서동일 감독님은 멋있는 사람,
나의 새아버지나 양아버지가 아니라 그냥 친아빠예요.”
〈우리들의 블루스〉 그후…
자신에게, 그리고 장애가 있는 친구들에게 건네는 편지
책에는 정은혜 작가를 세상에 널리 알린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은혜씨를 섭외한 노희경 작가, 그리고 함께 연기한 한지민 배우와 김우빈 배우의 그림도 있다. 노희경 작가가 은혜씨의 모습과 습관을 오랫동안 관찰한 뒤 ‘영희’라는 캐릭터에 녹인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는 은혜씨를 세상 사람들에게로 훌쩍 다가서게 해주었다. 그러나 정은혜 작가는 ‘영희’와 자신에겐 확실히 다른 점이 하나 있다고 말한다.
드라마에서 영희는 동생 ‘영옥’에게 돈 많이 벌어서 성형수술을 시켜달라고 하지만, 정은혜 작가는 지금 이 순간의 자신을 예뻐하고 사랑한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 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언제나 “저는 이미 모든 꿈을 다 이뤘어요. 항상 행복해요”라고 고백하는 은혜씨. 그는 혼자 지하철을 타면 성희롱을 당하고 시선강박에 시달리던 아픈 과거로부터도, 알 수 없는 미래의 불안으로부터도 이제는 모두 자유롭다.
노희경 작가는 이 책의 추천사에서 “은혜씨를 만날 때면 수시로 머릿속이 환해지고 피곤과 잡념이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고 썼다. 우리는 과거의 상처와 미래의 걱정거리로부터 도통 놓여나질 못하기에, 오로지 ‘오늘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은혜씨의 다른 선과 빛깔, 생각과 말에 새삼 놀라고 감동받는 게 아닐까.
드라마, 영화, 전시, 출판 등을 오가며 배우, 화가, 작가로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는 은혜씨는 지금 이 순간 행복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자신과 닮은 많은 장애인 친구들이 아직 ‘동굴’과 시설 속에 있음을 잊지 않는다.
“다른 발달장애인들도 사람들의 시선에 위축되거나 주눅들지 않고 행복하게 세상에 나왔으면 좋겠어요. 자기가 찾고 싶은 일도 하면서 돈도 벌고, 또 사람들과 같이 소통하고 만나고 행복해지기를 바라요.
시설에 있지 말고 사회로 나왔으면 좋겠어요. 나와서는,
음…… 나랑 함께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