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가거나, 다른 눈으로 보고 싶거나, 천천히 거닐고 싶은 사람을 위한 경복궁 안내서
경복궁은 조선의 정궁이었다. 조선 궁궐의 기준이었고, 경복궁을 기준 삼아 다른 궁궐들을 다양하게 변주했다. 광화문과 그 뒤에 놓인 흥례문, 근정문, 근정전의 중심을 따라 가상의 선을 그으면 엄격한 좌우 대칭이 만들어지는데, 이게 다른 궁궐과 구별되는 경복궁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좌우 대칭은 엄숙하고 권위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경복궁의 위엄과 권위는 다른 궁궐이 따라오기 힘들다. 따라서 조선의 궁궐을 알고 싶다면 먼저 경복궁을 봐야 한다.
이 책은 지난 몇 년간 경복궁에 푹 빠진 한 사람, 곧 박찬희박물관연구소장의 경험에서 출발한다. 3년 동안 홀로, 때로는 사람들과 함께 경복궁을 샅샅이 훑었다. 2021년에는 틈날 때마다 나들이 가듯 경복궁을 찾았다. 2022년에는 경복궁을 제대로 알고 싶어 30여 차례 경복궁을 찾았고, 갈 때마다 보통 5시간을 걸었다. 2023년에는 경복궁을 보는 방법에 주목해 사람들과 답사했다. 꽃 피는 봄에 시작한 답사는 청명한 가을에 마무리되었다. 그랬더니 같은 공간이라도 아침과 저녁이 다르고 봄과 가을이 달랐다. 가면 갈수록, 알면 알수록 경복궁은 점점 더 커졌다.
그래서 일부러 이 책에는 경복궁에 관한 고정된 지식을 담지 않았다. 대신, 경복궁을 보는 방법과 걷기에 집중하고 공간이 들려 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 경복궁을 가거나, 다른 눈으로 보고 싶거나, 천천히 거닐고 싶은 사람을 염두에 두었다.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서 출발해 경복궁을 걷는 주요 동선에 따라 권역별로 책을 구성했고, 뒷부분에서는 그동안 눈여겨보지 않던 특별한 곳을 다뤘다.
이순신 장군 동상 앞과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옥상정원에서 시작하는 경복궁 여행
경복궁 여행을 어디에서 시작하면 좋을까? 사람들은 대부분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으로 간다. 이곳도 좋지만, 경복궁을 제대로 보려면 광화문광장 초입의 이순신 장군 동상 앞이 제격이다. 이순신 장군 동상 뒤로 드넓게 펼쳐진 광화문광장 곁을 세종대로가 활주로처럼 뻗어 나간다. 그리고 광장과 대로 주위로 큰 빌딩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다. 조선시대에 이곳은 육조를 비롯한 중요 관청이 늘어선 거리이자 광장이었다. 당시 이 거리는 경복궁으로 가는 가장 중요한 통로였다. 따라서 경복궁뿐 아니라 육조거리까지 봐야 경복궁을 제대로 보는 셈이다.
광화문광장에서 광화문으로 향하기 전에 들러야 할 또 다른 곳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옥상 정원이다. 이곳에서는 경복궁의 규모와 구조가 한눈에 보인다. 경복궁을 관람하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작은 걸 보면 경복궁이 얼마나 큰지 어림짐작할 수 있다. 광화문부터 멀리 청와대까지 모두 경복궁 영역이다. 조선의 대표 궁궐답게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막상 경복궁에 들어가면 전체적인 규모나 구조를 헤아리기 어려우므로, 이곳에서 전체를 조망하고 가면 훨씬 경복궁 여행이 알차진다.
또한 이 책은 재밌으면서도 효율적인 여행을 위해 경복궁을 걷는 주요 동선에 따라 권역별로 책을 구성했고, 뒷부분에서는 ‘소주방과 세답방’처럼 그동안 눈여겨보지 않던 특별한 곳, ‘눈 맞은 건춘문 앞 은행나무 보기’처럼 나만의 방식으로 경복궁을 즐기는 방법을 다뤘다.
경복궁에 담긴 근현대사
경복궁은 조선 건국 3년 뒤인 1395년에 완성되었다. 조선의 중심 궁궐이었던 경복궁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 불탄 뒤 오랫동안 폐허로 남았다. 고종이 즉위한 뒤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1868년 경복궁을 중건했다. 그러나 경복이란 이름과 달리 이 시대는 살기 좋은 세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왕비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을미사변이 일어났고, 그 뒤 고종은 어렵게 경복궁에서 탈출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는 경복궁의 건물 대부분이 사라지고 1926년 완공된 식민 지배의 총본부인 조선총독부 건물이 경복궁을 답답하게 가로막았다. 한참 시간이 흐른 1990년대부터 시작된 복원 사업은 2045년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따라서 글쓴이가 밝힌 것처럼 “공간이 들려 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당연히 우리나라의 근현대사가 툭툭 튀어나온다. 그 가운데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자들의 경복궁에 대한 비틀린 사랑은 인상적이다. 이승만은 1959년 “머리를 식히고 낚시도 할 겸” 경회루 연못 북쪽에 하향정을 만들었고, 박정희는 덕수궁에 있는 국립박물관(훗날 국립중앙박물관)을 경복궁 동쪽으로 이전하며 경복궁에서 가장 이질적인 건물을 지었고, 전두환은 광주의 피가 채 마르지 않은 1980년 6월 하반기에 미스유니버스대회를 서울에서 화려하게 개최하고 경회루와 향원정을 배경으로 참가자들이 수영복을 입고 사진을 찍게 했다.
경복궁에 매력에 빠져들다
이 책의 앞에 여러 개의 추천사가 있다. 모두 글쓴이와 답사를 함께한 사람들이 쓴 글이다. 임보현 화가는 “경복궁 곳곳에 숨어 있는 신비한 동물들”에 주목한다. 광화문 앞 월대에 있는 해치, 영제교를 지키는 ‘메롱해치’, 함원전 화계의 거북 등이다. 그는 “박찬희 선생님과 함께한 첫 경복궁 투어는 재미있는 ‘동물 찾기 놀이’ 같았다”라고 회상한다. 주현정 캘리그라퍼에게는 ‘전각과 석물’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화려하지만 차갑게 보였던 전각과 석물이 따뜻한 피가 도는 생물처럼 다양하고 입체적인 얼굴로 다가왔다”라고 말한다. 김연희 출판편집자는 경복궁 답사에서 ‘조선의 생생한 역사 현장’을 떠올린다. 경복을 기억하는 모습은 제각각이지만 공통점이 있다. 모두 ‘경복궁의 매력에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역사 교사 박주연은 이렇게 고백한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듯 첫눈에 모든 걸 느끼긴 힘들 것입니다. 아니, 느낄 수 없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겁니다. 박찬희 선생님과의 답사 이후 여러 번 경복궁에 갔습니다. 다른 계절, 다른 시간에 다른 사람과. 어떤 날은 가벼운 산책이었고, 어떤 날은 자세히 들여다보는 답사였습니다. 그때마다 경복궁은 새롭게 저를 유혹했고, 전에는 보지 못했던 색다른 매력에 빠져들었습니다. 박찬희 선생님처럼 저 역시 앞으로도 계속 경복궁을 찾을 것입니다. 그렇게 경복궁을 즐기는 저만의 방식을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