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인간학이란 의미상 ‘인간에 관한 철학적 고찰’을 가리킨다. 인간에 대한 물음은 인간의 근본 특징에 대한 것이며, 역사적으로 볼 때 철학은 이러한 인간의 근본 특징을 전제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셸러는 오늘날 제기되는 철학적 인간학에 대한 문제가 종래의 ‘인간론(Menschenslehre)’과는 다르다고 분명히 선을 긋는다. 종래의 철학에서 설명된 인간의 근본 특징이란 인간의 다른 문제(예를 들어 ‘인식’이나 ‘실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요청된 근본 전제였다. 철학적 인간학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철학적’이라는 말과 ‘인간학’이라는 말을 분리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학이란 본래 ‘동물학(Zoologie)’의 한 갈래인 사실과학의 분과를 가리키는 말이고, 종래의 철학적으로 다뤄져 온 인간론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인간이 철학과 과학을 매개하는 새로운 종합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셸러는 현대인이 인간에 관한 개별 과학적 지식과 부분적 이해는 많이 가지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인간에 관한 종합적인 이해, 즉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전체적이고 통일적인 통찰은 결여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전체적 통찰이 결여된 원인을 셸러는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즉 오늘날 인간 지성을 대변하는 실증과학은 모든 것을 ‘감각적 소여(sense-data)’로 환원해 봄으로써 인간조차도 한갓 육체에 갇힌 존재로 파악할 따름이다. 여기서 종래의 절대자로 취급되어 온 ‘신’은 공허한 반향(反響)일 뿐이고, 오히려 실증과학은 유한한 사물과 선을 절대자의 위치로 고양시킴으로써 이로부터 물신숭배 또는 우상숭배가 나타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물신숭배로부터 벗어나 인간을 실증과학의 한계에서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셸러가 지향하는 철학적 인간학의 당면 목표이고, 이 목표를 수행해 가는 가운데 인간 그 자체의 전체성도 회복된다는 것이 철학적 인간학의 주요 쟁점이다. 이에 따르면 인간이란 단순히 육체적 존재도, 신의 피조물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존재는 세계와 신 사이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세계와 인간, 신의 삼자 관계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인간의 전체성도 회복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셸러는 세계, 인간, 신의 삼자 관계의 해명을 통해 철학적 인간학을 구축하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