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줄거리
강문혁 교수의 유고집 출판 기념 행사 후 나주연 대표가 모경인에게 대필 작가인 주제에, 겨우 그거면서, 모욕적인 말을 하는데도 경인은 웃기만 한다, 그 웃음 뒤에 가려진 그늘이 조안의 가슴에 작은 물이랑을 만든다. 위로해 주고 싶어서 어제 저녁, 양평에 있는 경인의 작업실인 이곳에 왔었다.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 그는 지난날 저질렀던 잘못을 가슴에 새긴 채 자책하고 있었다.
모경인이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다. 교보문고 앞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전화기도 꺼져 있다. 조안이 배우정과 경인이 살고 있는 양평 강산문원으로 찾아간다.
조안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목을 맨 경인의 늘어진 시신과 마주한다. 두 사람은 어처구니 없는 현실에 망연자실 한다. 자살이 아니다. 배우정이 단칼에 토해낸 말이다. 배우정이 모경인을 피붙이처럼 의지하고 존경하면서 룸 메이트로 같이 살아왔다. 장르작가인 배우정의 직감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16년 전 그들의 고향인 경기도 양평 쌍돈 마을에서 모경인은 조순숙을 사랑했고 조순숙은 임신을 하게 된다. 모경인은 시골에 가서 아이를 출산하고 야간대학을 다니자고 하지만 그녀는 단숨에 뿌리친다. 모경인의 자존감은 일시에 바닥으로 추락한다. 더구나 형제처럼 아끼고 소중하게 의지했던 친구 강문혁이 마을 뒷산 벼랑바위에서 순숙이와 함께 있다는 배우정의 말을 듣고 올라간다. 순숙이 강문혁에게 네가 내겐 처음이야. 엿듣게 된 모경인이 전율한다. 순숙이 바로 어제 자신에게 했던 말이다.
비가 추적대고 흔들바위는 미끄덩거린다. 갑자기 모경인의 등장으로 분위기는 살벌해진다. 감정이 격해진 셋은 손바닥 만 한 흔들바위 위에서 순숙이 미끄러져 바위 끝에 매달린다. 강문혁이 순숙의 손을 잡았고 모경이이 한손으로 문혁을 다른 한손으로 순숙의 손을 잡지만 기울어진 바위에서 그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 손을 놓친 순숙이 벼랑 아래로 곤두박질친다.
그렇게 16년이 지나고, 조안이 이모에게 입양되고 간호대학을 졸업한다. 그녀는 악전고투 끝에 한의대 편입한다. 그들이 다니는 K 대학에. 양평 중·고등학교 동창인 그들은 몰려다닌다. 도서관에서 조안은 모경인을 만난다. 언니 순숙이 사랑한 남자이면서도, 순숙의 손을 놓고 친구의 손을 잡았던 모경인. 조안이 그들이 속하고 있는 문학동아리에 입성한다. 조안이 오롯이 가슴에 품고 있는 복수라는 비수를 감춘 채 그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 간다.
그들은 행복한 것 같지 않다. 문학동아리 강산문방의 수장격인 강문혁이 유학 다녀온 후 모교의 전임교수로 임용되지만,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짙고 무겁다. 1년 열두 달, 검은 슈트에 검정 타이를 매고 다닌다. 제 손으로 떨어뜨린 조순숙에 대한 깊은 애도의 뜻이다. 한편 모경인은 외모에 비해 유약한 외골수에 소심한 성품이다. 빈농의 장남인 그의 아래로 일곱 명의 동생이 있다. 친구 강문혁 덕에 서울에서 공부하는 특혜를 누리지만, 두 사람은 과거의 한 지점에 묶여 있다. 순숙의 손을 놓친 건 의도적인 기피이었을까? 그날 밤, 비가 내렸고 흔들바위는 미끄러웠지만, 결사적인 노력을 했더라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소녀의 손을 놓칠 수 있었을까? 바로 그 지점에서 두 사람은 묵계라는 종이 사슬에 묶인 채 침묵한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조순숙의 죽음을 애도한다.
강문혁은 16년 동안 상복을 걸친 채 하루 한 끼니로 연명한다.
19개월 동안 식물상태로 누워있던 문혁이 서른 셋 생일날 숨을 거둔다. 이비의 지팡이로 얻어터진 그의 서른은 만신창이로 망가지고 쪼개진다. 강 회장은 설마 몰랐을까? 아들 문혁에게 빌붙어 사는 비렁뱅이 모경인이라고 착각한 횡포였을까? 문혁이 경인을 깔고 앉아 어둠 속에서 날아오는 지팡이 세례를 고스란히 받아 낸다. 왜 목을 맸을까? 어린 날, 벼랑바위에서 손을 놓친 순숙에 대한 죄책감으로? 예기치 않은 모경인의 죽음이 조안의 가슴에 쇠사설이 돼 친친 감긴다. 어젯밤, 그가 사랑한다고 조안의 무릎을 싸안고 속삭였다. 하지만, 그가 사랑한 대상은 언니 순숙이었다. 모경인이 아니 조안이 유도 했는지도 모른다. 젊은 두 사람은 깊숙이 다져둔 열정의 고리를 풀어 헤친다.
조안이 그들에게 어떤 물리적인 복수는 하지 않는다. 그들 스스로 날이면 날마다 부스러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 처연한 인간다움에 녹아내린 복수의 알갱이, 그녀는 손을 넣어 그 암 덩이를 꺼내 멀리 집어 던진다. 복수는 암이다. 16년 동안 그것을 품고 살았던 자신의 악바리를 그녀는 한줌 머리카락을 잘라 미운 세월과 함께 떠내려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