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전 것’들의 눈물겨운, 그러나 끝내는 아름다운 이야기
「조선여자전」에는 「숙영낭자 傳을 읽다」, 「심청전을 짓다」, 「소녀 girl」, 「꽃가마」, 「춘섬이의 거짓말」, 모두 다섯 편의 희곡이 실려 있다. 이 희곡들은 제각각 다른 사람들을 이야기하지만, 그 속의 인물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작가의 따뜻한 시각에 의해 잃어버렸던 이름과 자신의 서사를 회복하여, 되살아나고 있다.
‘조선여자전’이라는 특이하면서, 실은 이 책의 표제로 맞춤한 제목을 달고 있으나, 이 희곡들은 ‘조선’이 상징하는바 시대적 한계 상황과 신분제, 남녀 차별의 그룻된 문화 속에서 고통 받는 ‘여자’들의 이야기이면서, 여자가 ‘여자 사람’으로서 당당하게 자기 인생을 이야기하는, 그렇게 함으로써 역사의 장막에, 신분질서의 장막에 가려지고, 버려지고, 잊히거나 배제되어 온 자신의 인생과 서사를 회복하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숙영낭자傳을 짓다」는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 참가하였다가 에딘버러에 오는 관객들에게 ‘우리 규방 여인들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창작하였다. 결혼을 앞둔 양반댁 아씨의 혼수를 준비하는 규방에 모여 반상 차별 없이 만들어 가는 여성들의 훈훈한 이야기 공동체를 유쾌하고 때로 감동 있게 그려 보이고, 그러면서도 극중극의 형태로 전해지는 ‘숙영낭자’ 이야기를 통해 신분적 질서, 봉건적 규범에 얽매어 비극적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심청전을 짓다」는 우리 고전에서 대표적인 여성 캐릭터 중 한 사람인 ‘심청이’ 이야기를 설화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민중들 사이에서 어떤 마음의 결을 따라 전해지게 되었는지를 연극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풀어 나간다. 그 이야기를 둘러싸고 얼마나 많은 여성의 비극들이 얽히고설키며, 또 해원되는 과정을 겪어 왔는지를 잘 배치된 연극적 장치들을 통해 보여준다.
「소녀」는 유골로 고향에 돌아온 정신대 할머니를 소재로 하여, 일제강점기 조선 여인의 절망적인 삶을 보여주고, 또 그러한 역사적 희생자를 어떻게 한 가족의, 그리고 나아가 우리 모두의 역사로서 수용하고 위로하고 용서를 빌고 용서하게 되는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꽃가마」는 ‘정절녀’가 되기를 강요받은 병자호란 시기의 ‘환향녀’ 이야기를 다룬다. 여인들의 지혜롭고 용기 있는, 그런데다가 연대로 똘똘 뭉친 공동체 구성원들의 일사분란한 대처로 헛된 명분과 몰염치한 과욕에 찌든 양반의 허위의식을 여지없이 분쇄하고 새로운 삶의 세계를 개척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춘섬이의 거짓말」은 고전 한글소설 ‘홍길동전’에서 홍길동의 모친인 춘섬이 홍길동을 낳게 되는 과정을 연극적 상상력으로 극화한 것이다. 양반가 여종의 소생인 홍길동이 태어나는 과정을 통상적으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통쾌한 극적 반전(反轉)을 가미한 이야기를 통해 춘섬이의 용기 있는 결단을 부각시키고, 여성이 주체적으로 “어머니가 되기로” 하는 과정을 그려 보이고 있다. 이는 오늘 “행복한 어머니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되지 않기로 했다”는 말이 주류 언어가 되는 시대에 어머니 - 아이의 관계가 얼마나 거룩하고 소중한 것인지를 돌아보게 하는 또 다른 서사가 중첩된다.
작가는 이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공통점을 ‘뒷전의 사람들!’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 뒷전은 앞전(남자, 양반, 권력자)의 그림자가 아니라, 앞전의 든든한 토대이며, 실은 언제든지, 얼마든지 그들을 전복시킬 수 있는 참 생명의 힘을 간직한 자라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것을 작가는 “여인들 스스로가 이야기를 짓고 전한” 것으로 그려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