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지 않는 메아리
다시 또 부질없이 써놓은 평문들을 엮는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인
줄 알면서 산에 올라 “야호!” 하고 메아리를 불러대면 답답한 마음이
후련해질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버릇처럼 독자없는 평론집을 펴낸다.
버리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는 버릇이 나이 탓인가 싶다. 갈수록 글
쓰기가 힘들어진다. 눈이 쉽게 피로해지고, 오랫동안 컴퓨터앞에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이제 부질없는 글쓰기를 자중하라는 신체 반응에 순
응하지 못해 또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하고 말았다.
글쓰는 사람들에게 다소나마 용기를 북돋아주려는 뜻에서 작품평
들을 모아 엮었다.
이 시대에 문학이 죽었음에도 속알머리없이 경제적 손실을 마다하
지 않고 문학으로 죽어가는 이들이 되살아나길 기도하며, 그들을 격려
하기 위해 축하상을 차렸다. 그리고 흰옷을 입고 촛불앞에 기도를 올
린다. 혹시나 죽은 문학이 회생하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갖고 어리석은
잔치를 마련했으나 축하잔치에 오는 사람은 없다. 그러면서도 이런 어
리석은 잔치를 마련한 것은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하는 이 땅의 어머니
의 간절한 소망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누가 이상하게 생각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문학
의 회생을 기원하는 어리석은 기도는 사라진 농본시대의 전통적인 세
시풍속을 고수하려는 옹고집인지도 모른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다. 행복을 위해 물질적인 풍요만을 추구한 나마지
정신적인 산물인 문학마저 놀이문화로 변질되고 속물적인 물질문화로
변질되어가고 있는 현실에서 문학의 본질을 추구하는 짓이 어리석은
구시대적인 문화가 된 것은 당연할 것이다.
문학이 생활의 한 방편으로 취미여가활동이 되었고, 신분격상이나
허위의식을 포장하는 수단이 되어버린 오늘날, 문학의 본질과는 정반
대의 문학활동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자기 혼자 하얀 옷을 입고 있으면 뭇사람들의 관심을 끌지는 모르
만, 시기, 질투의 대상이 되어 하얀 옷에 얼룩을 묻히는 일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최승호 시인의 시 한귀절 “모든 것이 썩었어도 뻔뻔한 얼굴을 썩지
않는다”처럼 생명체는 죽으면 썩어서 물과 흙으로 되돌아가지만, 석유
에서 추출한 비닐과 플라스틱은 썩지 않고 보기 흉하게 너브러져 모두
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뿐이다.
그냥 썩어지게 내버려두어야 할 것들을 모아두는 두엄자리를 만드
는 심정이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는 두엄자리에 지렁이를 번식하여
되돌아올 것이다.
지렁이를 미끼로 강물에 낚시대를 드리우고 월척급의 붕어를 낚아
내듯이 대작을 낚아낼 수만 있다면, 큰 행운일 것이다.
2024. 12. 20.
香山齊에서 김관식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