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미처 못 본 유다를 둘러싼 이야기
그 안에 정경복음서의 미스테리가 숨어 있다
오늘날까지도 유다의 배신은 잔인한 입맞춤이라는 비정한 수식어가 따라붙어 다닐 만큼 그야말로 충격적인 사건이다. 공관복음서의 마가복음과 마태복음만 하더라도 유다의 배신을 다룰 때는 사탄을 언급하지 않는다. 마태복음은 마가복음보다 유다를 훨씬 더 야비하게 묘사하는데, 마가복음에서 확실하게 제시하지 못한 배반의 동기를 예수의 몸값이 많든 적든 이를 노린 자의 소행으로 몰아가고 싶어 한다. 누가복음은 유다의 이야기에 훨씬 더 가혹한 요소를 가미했다. 누가는 사탄이 가룟 유다를 배신으로 끌어들였다고 말한다. 요한복음은 유다를 두고 직접적으로 악마라고까지 하는데, 요한의 입장에서는 이런 유다라면 삼백 데나리온씩이나 하는 아까운 향유를 예수의 발에다 붓는 광경을 차마 지켜만 볼 수 없었기에 위선을 떨었다고 이해한다. 요한에게 유다라는 작자는 타고나기를 사탄(누가복음에서 얻은 영감일 테지만), 즉 태생적으로 악마였다. 마가복음, 그리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통해서는 최후의 만찬 직후 가룟 유다가 한동안 그 자리에서 꾸물거렸는지 아니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래서 유독 요한복음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 눈길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유다는 그 빵조각을 받고 나서, 곧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이것이 13이라는 숫자에 불길한 기운을 불어넣었을 믿음의 강요였던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이 점차 집단적인 신앙으로 자리 잡으면서 낮보다 밤이, 빛보다 어둠이, 사랑보다 증오가, 자비보다 분노가, 축복보다 저주가 오직 한 사람, 바로 가룟 유다에게만 퍼부어졌다.
하지만 전체 신약성서에서 의아한 점도 있다. 바울은 기독교 선교에서 결정적인 인물인데, 왜 바울은 가룟 유다의 배신 이야기라든지 빈 무덤 이야기라든지 예수 부활에 대한 여인들의 증언이든지 간에 이를 그들에게 들었을 법도 한데 왜 그가 작성했다고 인정되는 서신, 즉 데살로니가전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전·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로마서 등에서 이를 함구했을까? 만일 유다가 예수의 부활을 선포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전승이 떠돌았다면, 누가가 왜 그토록 유다의 최후를 처참하게 전했는지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누가는 자신이 열렬히 믿고자 한 예수의 부활을 전적으로 유다에게 맡기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마가가 유다의 최후와 예수의 부활을 동시에 다루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지 앞으로도 알 수 없으리라. 하지만 만일 당신이 이제까지 붙들었던 당신의 믿음을 돌아보고자 한다면, 당신은 마가가 유다의 최후와 예수의 부활을 함부로 전하지 않았던 이유에 한 걸음 정도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
유다복음, 우리가 미처 몰랐던 유다에 관한 또 다른 목소리
초기 교권주의자들은 유다의 희생을 전하는 문서와 함께 다양한 복음서를 금서 목록으로 지정하고 삼엄하게 감시했다. 그럼에도 뒤로 빼돌려진 몇몇 필사본이 존재한다는 풍문은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떠돌아다녔다. 그 가운데 유다복음이 있다는 소문도 무성했다. 실제로 유다복음은 존재했다. 미국의 성서학자 바트 어만은 유다복음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이 복음에 따르면 유다는 예수를 배반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원하는 일을 했습니다. 예수가 전하려고 한 진리를 유다 한 사람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버트 프라이스도 이렇게 말했다. “유다는 자신의 행위가 배신으로 보일지라도 예수를 배반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통해 유다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뜻깊은 일을 완수했다. 우리는 유다를 존경하고 칭송해야 한다. 왜냐하면 유다를 통해 십자가의 구원이 우리를 위해 준비되었으며 하늘로부터 내려온 계시가 이로써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랄 만한 점은 유다복음 전에도 이러한 목소리가 있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고 발터 옌스 같은 소설가들도 자신들의 영감을 유다복음에 빚졌던 게 아니라 자신들의 견해가 틀리지 않았다는 점을 사후의 찬사로써 유다복음을 통해 확인받았다. 가룟 유다의 배신을 새롭게 조망하는 이러한 견해는 믿음의 강요라는 선택지가 두 개뿐인 이분법적인 신앙관과 결코 어우러질 수는 없다. 앞으로도 대다수 기독교인은 끊임없이 유다가 저주받았다며 멸시하길 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다를 위한 변명, 배신자라는 오명을 벗고 이 책에서 안식을 찾다
예수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을지라도 그리스도는 무덤에서 태어났다면,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속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최후를 맞이했다는 믿음이야말로 그의 죽음을 더욱 숭고하고 장엄하게 만든 유다의 고발 없이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의 죽음은 유다의 잔인한 배신의 입맞춤 없이는 인류의 극소수가 감당하기도 하는 위대한 희생과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저자는 다른 무형의 십자가를 짊어졌던 가룟 유다가 이제라도 억울함을 풀고 고이 잠들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이 책은 이러한 관점에서 가룟 유다를 이해해 왔던 기존의 전통적 방식부터 살펴보고, 다윗의 요청으로 그를 배신한 척 행동했던 ‘후새’라고 하는 인물과 예수의 사람이었던 유다를 겹쳐봄으로써 그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있었던 일들의 의미를 새롭게 규명하고 있다. 여기에는 앞으로도 성서가 인류의 찬란한 문화유산으로 남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성서는 진리의 세계가 아니라 가치의 세계다. 가치의 세계에서는 다양한 진리가 혼재해 있기 마련이다. 그 다양한 진리 가운데서 이 세계와 소통 가능한 가치만이 성서의 진리일 것이다.